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 여래 좌상은 경상남도 창녕군 관룡사 용선대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 불상이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9세기의 것으로 관련 문헌 기록과 명문은 남아 있지 않다. 창녕 관룡사 뒷산 능성 용선대라는 거대한 자연 암반 위에 봉안되어 있다. 불상은 전체적으로 몸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다. 광배는 없고, 대좌는 상대·중대·하대를 갖추고 있다. 이 불상은 악마를 항복하게 하는 ‘항마촉지인’ 형식을 모델로 조성되었다. 이 불상을 통해 항마촉지인 형식이 9세기에 어떤 식으로 표현되었는지 알 수 있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관룡사(觀龍寺) 뒷산 오른편 능선인 용선대(龍船臺)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불상이다. 광배(光背)는 없어졌고, 대좌 하대(下臺)의 복련(覆蓮) 일부가 부서졌지만, 나머지 부분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이다. 불상은 1.87m이며, 대좌는 1.57m이다.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에 관한 문헌 기록과 명문이 남아 있지 않아 조성 배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용선대의 ‘용선’은 ‘반야용선(般若龍船)’에서 유래된 듯하다. 반야용선은 사람이 죽어서 저 세상으로 갈 때 타고 가던 배를 말하지만, 이 지명이 석조여래좌상의 성격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용선대라는 거대한 자연 암반을 지대석(地臺石)으로 하여 그 위에 봉안되어 있다. 석조여래좌상은 통견(通肩) 형식으로 법의(法衣)를 입고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있다. 오른손은 손등을 위로 한 채 무릎 위에 올려 놓았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오른쪽 발바닥 위에 놓여 있다. 이로 보아 수인(手印)은 통일신라시대 8세기에 유행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모델로 하였으나, 손 자세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한 듯하다.
불상은 머리가 몸에 비해 큰 편이며, 하체도 상당히 볼륨감 있게 표현되어 안정감을 준다. 낮고 편평한 육계(肉髻), 큼직큼직한 나발(螺髮), 커다란 이목구비(耳目口鼻) 등 원만한 상호(相好)를 갖추고 있다. 큰 귀는 어깨까지 닿았으며,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법의(法衣) 주름은 형식화되고 간략화되어 있다.
대좌는 상대(上臺)와 중대, 하대를 갖추고 있는 팔각연화대좌(八角蓮華臺座)이다. 앙련(仰蓮) 형식의 상대는 연잎 중앙에 화려한 꽃무늬가 장엄되어 있는 중판연화문(重瓣蓮華文)으로서 화려하고 힘찬 모습이다. 중대는 비교적 높게 조성되었으며, 각 면마다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복련(覆蓮)의 하대는 방형(方形)의 받침 위에 복판연화문(複瓣蓮華文)으로 장엄되어 있다.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8세기에 유행했던 항마촉지인 불좌상을 모델로 하여 조성되었으나, 불상의 양식이나 수인(手印), 중대가 길어진 대좌 형식 등을 통하여 볼 때, 통일신라시대 9세기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수도 경주(慶州)에서 유행하던 항마촉지인 불좌상을 모델로 하여 조성되었다. 그러나 편단우견(偏袒右肩) 형식이 아닌 통견 형식으로 옷을 입고 있으며, 수인도 모호하게 표현되는 등 도상(圖像)에 대하여 이해가 부족하였던 듯하다. 비록 상호는 통일신라시대 8세기 불상과 거의 비슷하지만, 전체적인 비례와 법의의 주름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9세기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산 정상부에 조성되었다는 점과 항마촉지인 불좌상이라는 점에서 통일신라시대 8세기에 조성된 경주 석굴암 석굴(국보, 1962년 지정)의 본존을 모델로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산 위에서 아래를 조망하면서 조성된 석굴암의 항마촉지인 불좌상의 형식이 9세기에 경상남도 창녕 지방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었는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이 불상의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