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는 서울의 종로 네거리에서 을지로 사거리 방향으로 나가다가 청계로와 만나는 길목의 청계천을 건너다니던 조선시대에 조성된 다리이다. 원래 이름은 대광통교(大廣通橋)로 광통방에 있는 큰 다리라는 뜻이다. 육조거리·운종가·숭례문으로 이어지는 중심 통로였다. 1410년(태종 10)에 흙으로 만든 다리가 홍수로 파괴되자 석교(石橋)로 개축하였다. 1899년 전차노선이 신설되면서 선로 밑에 묻히게 되었는데, 해방 이후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남아 있던 다리도 사라졌다. 2003년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복원되었다.
원래는 광통방(廣通坊)에 있는 큰 다리라는 뜻의 대광통교(大廣通橋)이다. 실제로 길이 약 12.3m보다 폭이 더 넓은 약 14.4m의 다리였다. 또, 소광통교(小廣通橋)와 구분하여 대광교(大廣橋)라고도 하였고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북광통교(北廣通橋)로 기록되어 있다. 약칭인 광교(廣橋), 광충교(廣冲橋) 등으로도 불리었으며, 도성 안 개천에서 여섯 번째에 있었다고 해서 육교(六橋)라고도 하였다. 광교는 후에 이 일대를 지칭하는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육조거리 · 운종가 ·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이 밀집한 상업활동의 중심지로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였다. 조선시대 도성 안에 수축되었던 다리 가운데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다리이다. 시전 뒤로는 생산의 배후지로서 수공업 작업장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광통교 좌측, 지금의 서린동 주변에는 금방(金房), 은방(銀房), 옥방(玉房)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엄장(耳掩匠)도 이 일대에 자리 잡았다. 대광통교와 소광통교 사이에는 두석방(豆錫房)이, 관철동에는 관자(貫子) 제조장과 신발 제조장이, 철물교 주변에는 철물제조장이, 광통교 북쪽 무교동 일대에는 가구장(家具匠)이 밀집해 있었다.
태조 때 토교(土橋)로 축조하였던 것인데, 1410년(태종 10)에 홍수로 파괴되자 다시 석교(石橋)로 개축하였다. 다리 건설에 사용되었던 석재는 태조의 계비(繼妃) 강씨의 묘인 정릉의 천장(遷葬)으로 봉토하려던 12개의 석각신장(石刻神將)을 뽑아 이용하였다.
청계천은 조선시대에 도성 한 가운데로 흐르면서 주변 산지에서 흘러내리는 유수와 민가의 하수를 유출하던 큰 배수로의 구실을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초기로부터 계속 준천과 복개의 논란 속에 있었다.
1899년 종로에서 남대문 구간에 전차노선이 신설되면서 다리 동편에 전차선로가 놓이게 되었다. 1910년 이 노선이 복선화되고 다리 위로 전차가 통행하게 되면서, 다리는 1m 정도의 콘크리트 선로 밑에 묻히게 되었다. 해방 이후 1958∼1961년에 걸쳐 이루어진 암거공사(暗渠工事)에 의하여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이 다리도 자취를 감추었다.
2003년 7월 시작된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시대의 대광통교가 있던 자리에 광교가 새롭게 놓였다. 교통 흐름을 방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광교에서 청계천 상류 쪽으로 155m 쯤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다리의 원형복원을 위하여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부분과 창덕궁 및 탑골공원에 흩어져 있던 부분을 찾아내 활용하여 조선기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현재는 사람만 건너다닐 수 있다.
청계천 복원사업에 의해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청계천로와 청계고가도로는 철거되고 청계천은 복원되었다. 서울시의 국제경쟁력을 갖춘 관광명소조성 및 도시마게팅의 일환으로 청계천변과 광교일대에서는 역사성과 전통을 가진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도심재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기존의 불량건물은 철거되고 금융업과 기업체의 중심업무를 담당하는 고층빌딩이 들어서는 등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