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 후 많은 무장 독립운동 단체가 결성되었으나, 1920년 일본군의 간도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1921년 이후 임시 군사연합회를 조직하여, 국민단을 구성하는 등 각 단체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장백현(長白縣)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대한독립군비단·흥업단·대진단(大震團)·태극단·광복단의 5개 단체가 연합하여 만들어진 대한국민단(1921.10)을 1922년 4월 광정단으로 조직하였다. 그리고 8월 환인현(桓仁縣)에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중심으로 여러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하였다.
광정단 단장에 김호익[金虎翼, 이칭: 김호(金虎)], 총무에 윤덕보[尹德甫, 일명: 병용(秉庸)], 군무장(軍務長)에 강진건(姜鎭乾), 재무장에 김관용(金寬用), 비서장에 장승언(張承彦)이 임명되었다.
그 뒤 1923년 6월 조직 개편을 단행하여 단장에 윤덕보, 부단장에 김호익, 총무에 석계(石桂), 비서에 김성진(金聲振), 재무부장에 김국태(金國泰), 서무부장에 장승언, 경호부장에 정철명(鄭哲明), 군사부장에 이한평(李漢平), 군법과장에 김용대(金容大), 문화부장에 한성일(韓性一), 산업부장에 최진용(崔鎭鏞)으로 재편되었다.
그런데 이전에 군비단 단장으로 국내 진입작전을 중시하던 윤덕보가 단장으로 된 것은 국내 진입 작전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선 안도현(安圖縣) 산중에 군영을 설치하고, 수백 명의 장정을 모집하여 2개월간의 군사훈련을 시켜 장백·안도·무송·임강 등 각 현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장백현 14도구 북방자(北房子)에 재봉소를 설치하여, 군복 등 군수품의 자급 자족을 꾀하였다. 중앙 본부는 무송현(撫松縣) 왕파방자(王杷傍子)에 정하고, 원문화(元文化)를 단장으로 하는 암살단을 별도로 편성하여 임강현(臨江縣)에 두었다.
그리고 무송현에 참모부를 설치하고, 참모장에 이덕신(李德信)을 임명하였으며 기금을 모아 무송현에서 30리 떨어진 지점에 동차구(東岔口) 대진동(大鎭洞)에 백산무관학교(白山武官學校)를 설립하려고 하였다.
1923년과 1924년에 소속 독립군을 국내에 진입시켜 일본 식민 통치 기관의 파괴, 친일파숙청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무기 구입·군대 양성 등의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24년 10월 독립군을 3개대로 편성, 제1대는 나성(羅性)이 150명을, 제2대는 김백(金伯)이 3백명을, 제3대는 남익(南翼)이 50명을 지휘하였다. 김호익·윤세복(尹世復) 등은 중국과 정치적 교섭을 벌였으며, 김용대는 무기구입을 담당하였다.
1924년 11월 남만주 각 단체 대표자들이 길림(吉林)에서 단체통합을 결의하고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자 이에 합류되면서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