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청암(淸菴)·정암(貞菴)·우운(又雲). 충청북도 청원 출신. 18세에 동학교인이 되었다.
1894년 동학운동 때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6만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해 진압당한 뒤 전국 각지를 방랑하였다. 1908년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입교했다. 이후 천도교의 전제관장(典制觀長)·이문관장대리(理文觀長代理)·금융관장(金融觀長)·보문관장(普文館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 25일경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 참배를 위하여 상경했을 때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에게, 3·1운동 계획을 들었다.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 달 27일에 최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과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고,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열기하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한 사람 중에서 29인이 모였다. 이 때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해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자진해 붙잡혀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감사원장·선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22년 말 천도교 신파가 ‘천도교 연합회’를 설립하여 분립하자, 천도교에서 탈퇴하여 수운교와 상제교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1927년 이후 신간회에서 활동하다가, 신간회가 해체되자 다시 천도교 구파로 돌아왔다.
저서로는 『조선총사(朝鮮總史)』·『이조전란사(李朝戰亂史)』·『궁중비사(宮中秘史)』 등이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