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대사간, 도승지,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윤휴(尹鑴)가 주자학을 호만(浩漫)하다고 비판하고, 박세당(朴世堂)이 『사변록(思辨錄)』을 지어 주자학을 배척하여 왕명에 의해 그 책이 불태워질 때, 두 사람을 공박하는 내용의 변설문(辨說文)을 작성해 김창협(金昌協)으로부터 그 학식을 높이 칭찬 받았다. 경연(經筵)에서는 호족의 폐해와 군제(軍制)의 개혁을 주장하고, 또한 궁장(宮庄)의 절수(折受)가 성덕의 허물이 됨을 주장하였다.
1703년 수원부사가 되어 관리의 비행을 숙정(肅正)하는 등 치적을 남겼고, 1704년 대사간이 되고, 동부승지 · 이조참의 · 예조참의 · 공조참의 등을 거쳐 전라관찰사가 되었다. 1709년 개성유수를 거쳐 평안감사에 임명되었으나, 공의(公議)에 따라 대사성으로 옮긴 뒤 도승지가 되었다.
대사헌 정호(鄭澔)가 윤증(尹拯)을 논핵한 일로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갈 때 연루되어 면직되었다가 곧 서용(敍用)되어 이조 · 예조 · 병조 · 형조 · 공조의 5조참판을 역임한 뒤, 한성좌윤과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국경의 확정 문제로 관서접반사(關西接伴使)가 되었고, 해적의 진무를 위해 호남순무사가 되기도 하였다.
1715년 형조판서, 1716년 호조판서가 되었다가 예조판서 · 한성판윤 · 우참찬 등을 지냈다. 그 뒤 이조판서가 되어 숨은 인재를 많이 등용했으나, 1721년(경종 1) 신임사화 때 탄핵을 받아 삭직되어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했다가 이듬 해 풀려났다. 그 뒤 향리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성리설에 밝았으며, 특히 『논어』와 『주역』에 관통하였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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