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연극을 하는 장소만을 지칭하다가 무용·음악·예능 등의 모든 무대예술을 하는 장소로 극장의 개념이 확대되었다. 극장(theatre)의 어원이 관람석(theatron)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듯이 극장은 배우와 관객을 하나의 공간 속에 연결하는 데 의의가 있으며, 그 건축양식이나 구조는 시대적 변천을 겪어왔다.
그리고 극장의 형태와 연극양식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다양한 무대예술을 공연하는 장소라는 극장 개념은 20세기에 들어와서 기계문명의 발전에 따른 영화가 등장하면서 변화되어왔다. 영화가 처음 생겼을 때는 무대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극장에서 상영되었으므로 극장은 무대예술 외에 기계예술까지 다목적으로 활용되었다.
서양에서는 영화상영만을 목적으로 한 영화관이 생겨나면서 극장과 영화관은 뚜렷이 구별지어졌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개화기에 처음 극장이 세워지면서 연극·무용·영화 등을 같은 극장무대에서 상연하는 습성이 생겼고, 그것은 1950년대까지 지속되어왔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는 극장이라는 개념이 연극·무용·음악·영화 등을 상연하는 장소로 인식되어 있으며, 대중에게는 오히려 영화관으로서 인식된 실정이다. 무대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극장과 영화관이 뚜렷하게 구별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였다.
세계연극사를 보면 극장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최초의 극장을 가진 나라는 그리스로 서기전 5세기 무렵에 이미 반원형의 장소에 유자형(U字形)으로 관중이 앉을 수 있도록 목조무대를 세운 야외극장이 있었다. 1백년쯤 뒤에는 비교적 과학적 시설을 갖춘 아테네의 디오니소스극장을 비롯해 그리스 전역에 40여 개의 극장이 세워졌다.
그로부터 1세기 뒤에는 석조극장까지 세워질 정도로 서양에서는 매우 일찍부터 극장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개화기에 와서야 극장이 세워졌다. 고려시대에 산대(山臺)라는 가설무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우리의 전통극이 야외놀이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옥내 극장이 발전되지 못한 것이다.
개화기에는 우리 나라 연극사의 중요한 변화를 이루게 된 하나의 요인인 옥내극장들이 설립되었다. 창고 같은 기존건물을 연예공연을 위한 옥내극장으로 개조했는데, 광무대(光武臺)·아현무동연희장(阿峴舞童演戱場)·용산무동연희장 등이 초기의 대표적인 극장들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옥내극장 형태를 갖춘 최초의 극장은 1902년에 설립된 협률사(協律社)이다.
협률사는 연극사상 최초의 관립극장[皇室劇場]이기도 한데, 3년반 만에 문을 닫기는 하였지만 개화기의 대표적인 극장이었다. 협률사는 5백 석 규모의 중형극장이었으나 당시 기술의 부족으로 인해 무대구조·조명 등에 있어서 원시성을 탈피하지 못하였다. 이 극장은 1908년 7월에 민간인들에 의해 원각사(圓覺社)라는 명칭으로 다시 개관되었지만 고전예능과 창극을 주로 공연하다가 국권상실과 함께 2년여 만에 완전 폐쇄되었다.
개화기에는 이러한 관립극장과는 달리 광무대·연흥사(演興社)·단성사 등의 사설극장들이 세워져 무대예술발전에 기여했다. 서울 동대문 부근(광무대)·종로(단성사)·낙원동(연흥사) 등지에 자리잡고 있던 이들 사설극장들도 시설은 형편 없었고 중형 규모였다. 그러나 이 사설극장들은 창극이나 민속무용 등의 전통예술을 주로 공연한 광무대를 제외하고는 주로 영화를 많이 상영하였다.
특히 광무대는 1931년 폐관될 때까지 우리 나라 전통공연예술을 전승시키는 활동무대로서 대단한 공로가 있다. 1911년부터 신파극이 생기면서 연흥사는 그 본거지 구실을 하였다. 이들 극장들은 원각사가 그러했듯이 프로시니엄 아치(proscenium arch) 형태의 무대는 갖추었으나, 객석에는 의자도 배치되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명도 전등을 사용하는 정도였다.
음향시설은 물론 화장실 시설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여성들은 작은 요강을 갖고 극장에 갈 정도였다.
이러한 극장 사정은 1920년대까지 별로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한국인이 경영하던 조선극장 정도가 그래도 괜찮은 공연장이었다. 일본인 흥행업자들이 서울·부산·인천·대구·광주·평양 등 대도시에 극장을 짓기 시작하면서 시설도 많이 개선되었다. 일본인 흥행업자들은 예술보다는 흥행만을 생각하고 극장을 경영했기 때문에 영화와 신파극만을 상연하였다.
영화가 인기를 끌자 전국의 일본인 소유 극장들은 거의 다 영화만을 상영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 연극인들은 공연을 위해 극장을 빌리는 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고, 일본인 흥행업자에게 착취와 박대를 함께 당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연극전용극장으로 설립된 것이 바로 동양극장(東洋劇場)이다.
이 극장은 무용가 배구자(裵龜子)·홍순언(洪淳彦) 부부가 1935년 11월 서울 서대문 근처에 20여만 원을 들여 설립했는데, 회전무대와 호리촌트, 조명실의 배전반까지 갖추고 무대에 스팀까지 들어올 정도의 시설을 갖춘, 당시로서는 최신시설의 근대적 연극전문극장이었다.
중형 규모의 동양극장은 청춘좌(靑春座)와 호화선(豪華船) 등의 전속극단을 비롯해 전속연출가·작가·무대미술가·조명가까지 둘 정도로 전문화의 길을 걸음으로써, 단번에 우리 나라 대중연극의 중심지가 되었다. 상당한 액수의 월급제를 장기간 실시한 극장도 동양극장이 처음이었는데, 이는 그만큼 전문극장으로서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동양극장은 광복 직후까지 대중연극의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사설극장과는 달리 1939년 다목적 홀 성격의 대형극장인 부민관(府民館)을 서울 태평로에 세웠는데, 1천석이 넘는 객석과 대형무대의 등장으로 공연물도 대형화되기 시작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광복과 함께 극장 판도는 크게 변했다. 우선 전국의 극장 한 두 개를 제외하고 모든 극장이 일본인 소유에서 한국인 소유로 바뀐 점이다. 그러나 극장들이 연극인들에게 넘겨진 것이 아니라 비전문적 흥행업자들에게 넘겨짐으로써 광복 후 연극 발전의 장애가 되었다.
처음에는 주요 극장들이 한국인 소유가 되어 공연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서울의 주요 극장들인 중앙극장·수도극장·대륙극장·동양극장·단성사·국제극장·제일극장·국도극장 등이 연극과 영화를 상연하다가 점차 영화관으로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다시 연극전용극장의 필요성이 나타났고, 국립극장 설치운동이 문화계에서 광범위하게 일기 시작하였다.
1950년 4월에 최초로 국립극장이 설립되었으나 건물을 새로 지은 것이 아니고 구부민관 건물의 내부를 수리하여 개관한 것이었다. 국립극장은 대표적인 연극인들을 모아 협의기구로 신극협의회를 구성하고, 전속극단으로 신극협의회와 극예술협의회를 두었다. 5천만 원을 들여서 내부 일체를 수리하고 현대적 호리촌트와 조명기구를 모두 갖추었다.
국립극장은 개관공연인 유치진(柳致眞) 작, 허석(許碩) 연출의 <원술랑>이 1주일 동안 6만여 명의 관객이 동원될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이 국립극장 개관은 광복 직후 좌·우익 연극의 분열·갈등이 일단 정리되고 민족연극이 정립단계에 들어섰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립극장은 일단 폐쇄되었다가 1953년 2월에 피난지 대구에서 문화극장이 국립극장으로 지정되어 재개관되었는데, 이때 전속단체를 두지 않고 수지타산만을 생각한 흥행 위주의 공연을 자주 가져 비난을 사기도 하였다.
1957년 6월에는 서울로 돌아와 명동에 있는 시공관(市公館:옛날의 明治座)을 국립극장으로 쓰게 되었다. 새 국립극장은 3층 건물로서 1935년 일본인이 영화관으로 지은 것이지만 연극공연장으로서 손색이 없는 건물이었다. 국립극장이 환도하면서 신극협의회도 다시 전속단체로 복귀하여 국립극장이 우리 나라 연극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전쟁 직후이기 때문에 연극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영화나 여성국극이 인기를 끌면서 대부분의 사설극장들이 관중을 끌어모았기 때문에 연극은 명맥유지조차 어려웠다. 1958년 12월 서울 을지로 입구에 소극장 원각사가 개관되었고, 이 본격적인 소극장이 생기면서 침체되었던 공연예술계가 생기를 찾았고 극단들도 몇 개 더 조직되었다.
원각사는 시설도 비교적 좋았고 내부나 극장문이 정취가 풍기도록 꾸며져 있었는데 불행히도 1960년 12월에 불이 나서 전소됨으로써 소극장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1962년 4월에 유치진이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받아 현대식 중형극장인 드라마센터를 건립함으로써 연극 부흥의 새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극장은 1백 평의 본무대, 30여 평의 원형무대와 양편에 사이드 스테이지(side stage)를 갖추고, 소극장 아래층에 도서실과 연극학교의 교실, 그리고 작가실·의상실·분장실·욕실 등을 규모있게 갖춘 최신식 극장이었다.
그러나 재정문제에 부닥쳐 1년도 채우지 못하고 휴관하는 등 개관과 휴관을 거듭하다가 지금까지 재기하지 못하고 부속학교인 서울예술전문대학의 강당으로 쓰이고 있다. 드라마센터는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연극 발전에 별다른 기여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자 극단들은 다시 공연을 위해 명동의 국립극장 무대로 되돌아왔고 따라서 국립극장도 처음 설립목적과는 달리 대관극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처럼 연극공연장의 부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면서 다시 소극장운동이 일어났다. 1969년 4월에 자유극장 대표 이병복(李秉福)이 서울 충무로2가에 다방 겸용 살롱형의 소극장 ‘카페 떼아트르’를 개관한 것을 시작으로, 극단 에저또가 을지로에 소극장을 개설하였고, 1970년대에 들어서서는 실험극장 등이 자체적으로 소극장을 마련하여 국립극장 중심의 공연방식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1973년에는 명동의 국립극장도 정부에 의해 매각되고 서울 장충동에 신축 국립극장이 세워졌다. 이 국립극장은 4백 평 무대에 지름 20m의 회전무대와 최신시설의 조명·음향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전속단체도 5개에서 8개로 늘리는 등 대형화되었다. 국립극장은 명동시절과는 달리 자체공연만을 주로 갖기 때문에 사설 극단들은 소극장 등에서 주로 공연하며, 1981년에 관립극장인 문예회관이 세워진 뒤 큰 공연들은 여기서 열리고 있다.
1980년대 들어 서울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많은 소극장들이 개관함으로써 극단들은 이전과 같은 공연장 부족현상에서는 벗어난 셈이다. 더욱이 예술의 전당과 같은 고급 오페라극장이 생겨난 것은 우리의 극장수준이 세계수준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 나라의 극장은 형극(荊棘)의 근대사 속에서 지지부진하게 발전해오면서도 대중에게 오락을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각성시키는 기능도 하였다. 다만, 무대예술이 전문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극장들이 때로는 울분토로의 장(場)으로, 또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오락장으로서의 구실을 해왔고, 대중의 교양 향상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극장들이 제 구실을 하려면 연극·무용·음악 등 공연예술이 활성화되어야겠지만, 그에 앞서 극장들도 전문화를 이룩해야 할 것이다. 과거처럼 무엇이든 상연하는 잡종의 극장 또는 다목적 홀이 아니라, 성격이 다른 연극·무용·오페라·전통예술 등이 제대로 공연될 수 있는 전문극장으로 분화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