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축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믿어지고 있다. 조선시대 당시의 둘레는 2,946척이다.
이 산성은 동쪽을 제외한 서·남·북면이 모두 험한 산비탈을 이루고 있고, 오직 동쪽만이 넓고 평탄하게 트여 있다.
성벽은 4개의 봉우리를 에워싸고 있는데, 동쪽 봉우리를 노적(露積), 남쪽을 다복(多福), 서쪽을 오도(悟道), 북쪽을 정녕(定寧)이라 부른다. 사방이 높고 가운데에 고을을 이룬 포곡식(包谷式)에 속한다.
고려 현종 때 거란족이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될 때에 왕이 나주까지 몽진하여 여기에 머물렀으며, 원종 때 각지의 백성들이 이곳에 입보(入保)하여 무사하였다고도 한다. 때문에 금성산신(錦城山神)은 영험이 있다고 믿어져왔으며, 이러한 신앙적인 근거도 튼튼한 성이 사람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에 생겨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고려의 태조왕건이 이곳을 배경으로 후백제의 견훤을 견제하였던 유서깊은 곳으로, 역사상 한번도 패하거나 항복해본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산성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 시가지가 되면서 파괴되어 축조공법이나 규모 등을 알 수 없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