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책판은 원래 43매였으나 지금 33매가 남아 있다.
이 책판은 송몽인이 31세로 세상을 떠나자 부인 민씨가 유고(遺稿)를 거두어 1615년(광해군 7) 외숙부 이수광(李睟光)에게 부탁하여 편교(編校)하고, 다음해 우인(友人) 죽창(竹窓)이시직(李時稷, 1572~1637)이 글씨를 쓴 뒤 비래암(飛來庵)의 승려 지숭(智嵩)이 새긴 것이다. 이때 찍은 판본은 국립중앙도서관과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송몽인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문병(文炳), 호는 금암(琴巖)이다. 어려서부터 시에 탁월한 자질을 보였으며, 1605년(선조 38)에 진사에 합격, 대과를 준비하다가 31세에 죽었다. 요절하였기 때문에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하였으나, 시문은 대단히 뛰어나 이수광(李睟光) · 신익성(申翊聖) 등이 그의 저서인 『금암집(琴巖集)』의 서문과 발문에서 그의 시적 재능을 칭송하였다.
이 책판은 처음에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에 있는 비래암에 보관되었다가 동구 이사동에 있는 영귀대(永歸臺)의 동로사(東魯祠)를 거쳐 1971년에 재건된 사우당(四友堂) 도광서고(道光書庫)에 옮겨 보관되었다. 지금은 대전광역시 향토사료관에서 보관 중이며, 1992년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금암집판목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송몽인의 문학작품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