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화사몽유록」은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이다. 성허라는 사람이 꿈속에서 중국의 역대 창업 군주들이 중흥 군주와 여러 신하를 불러 모아 역사적 품평을 하며 연회를 벌이는 모습을 목격하는 내용이다. 17세기 중반 경에 창작된 몽유록으로, 중국 인식을 담은 작품이다.
1권 1책. 한문 필사본, 국문 필사본, 국문 활자본, 국한문 혼용 활자본.
한문본 59종, 국문본 25종, 활자본 6종 등 많은 이본을 보유하고 있는 작품이다. 최근에는 19세기 개작본 「금산사대몽록(金山寺大夢錄)」(한문 필사본, 박철상 소장본) 1종과 이본인 「금화사기(金華寺記)」(한문 필사본, 일본 조도전대학도서관 소장본)가 각각 발굴되어 보고된 바 있다.
이본별로 「금화사기(金華寺記)」, 「금화사태평연몽유록(金華寺太平宴夢遊錄)」, 「금화사태평연기(金華寺太平宴記)」, 「금화사경회록(金華寺慶會錄)」, 「금화영회록(金華靈會錄)」, 「금산사몽유록(金山寺夢遊錄)」, 「금산사기(金山寺記)」, 「금산사창업연기(金山寺創業宴記)」, 「금산사창업연의(金山寺創業演義)」, 「금산사창업연회록(金山寺創業宴會錄)」, 「금산사창업연록(金山寺創業宴錄)」, 「성생전(成生傳)」, 「제왕연회기(帝王宴會記)」, 「부용당」 등 제명이 다양하다.
크게 '금화사 계열'과 '금산사 계열'로 나눌 수 있으며 두 계열은 상당한 내용 차이를 보인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한문 필사본 「금화사몽유록(金花寺夢遊錄)」이 선본(善本)으로 알려져 있다.
명나라 숭정 기묘년인 1639년에 창작되었다는 「왕회전」 발문의 기록을 준신한다면 17세기 중반에 창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확정된 것은 아니다.
원나라 지정(至正) 말년에 중국 산동(山東)에 성허(成虛)라는 선비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성허가 금화사에서 놀다가 꿈을 꾼다. 한 곳에 가보니 수많은 군대를 거느린 한고조(漢高祖), 당태종(唐太宗), 송태조(宋太祖), 명태조(明太祖) 등 중국 역대의 창업주들이 백옥탑(白玉塌)에 좌정한다. 제왕의 좌정이 끝나고 그들이 거느리고 온 문무제신을 동서로 나누어 앉히고는 주연을 베푼다.
한고조가 먼저 군신의 충렬에 힘입어 대업을 성취하였음을 말하고, 다음으로 당태종, 송태조, 명태조 등이 공신들의 지모와 용략으로 각각 창업을 성취하였음을 말한다. 창업의 이야기가 끝나고, 당태종의 말에 따라 동한(東漢)의 광무제(光武帝), 촉한(蜀漢)의 소열제(昭烈帝) 등의 중흥주를 초청하여 역대의 제왕과 공신의 반열을 정한다.
제갈량(諸葛亮)이 역대 공신들의 공적을 논평한 다음, 술이 취하자 가무를 한다. 가무가 끝난 뒤 동방삭(東方朔)을 시켜 역대 군신을 총망라한 내각을 구성한다. 수상에는 동방삭, 좌상에는 제갈량, 우상에는 소하(蕭何)가 임명된다. 내각 구성이 끝나자, 한고조는 한유(韓愈)를 시켜 제왕연(帝王宴)에 대한 송시를 짓도록 한다.
이때 연회에 초청을 받지 못한 원태조(元太祖)가 변방의 추장들을 거느리고 쳐들어오자,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漢武帝)가 출전하여 격퇴시킨다. 이윽고 날이 새고 닭이 울자 제왕과 군신이 해산하고, 그 연회를 구경하던 성허도 놀라 깨니 일장춘몽(一場春夢)이었다.
「금화사몽유록」에서 꿈을 꾸는 성허는 주인공의 입장에 서서 꿈속의 세계를 전개시키는 것이 아니라, 꿈속에 전개되는 세계를 관찰만 하는 방관자형 몽유자이다. 이에 따라 작자의 이상을 꿈을 빌려 표현하기 보다는 꿈을 통하여 중국 역대의 창업주들과 그 공신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은 제왕연에 초점을 두고 있다.
주목할 것은 창업한 제왕들을 연회에 참석시키면서도 원태조만은 초청하지 않은 점이다. 이에 반발한 원태조가 원한을 품고 공격해 오고 진시황과 한무제가 그를 격퇴한 것을 통하여 한족(漢族)이 중심이 되는 중국인의 정통적인 역사관을 짐작할 수 있다. 곧 역대 실존 인물들이 그에 적대되는 존재들로 인해 야기된 혼란을 평정한다는 기본적인 서사 구도 아래,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의리론을 펼치고 있다.
이 작품은 『삼국유사』의 「조신」에서부터 이어져 온 한국 몽유 양식의 전통 아래 창작되었다. 몽유록의 전형적인 서술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좌정과 토론 대목을 반복 및 확장하고 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친숙한 중국 인물들을 몽중 세계로 끌어들임으로써 독자층의 서사적 욕구에 부응하는 반면, 치열한 문제의식은 약화되어 있다. 17세 후반을 기점으로 통속성이 강화되는 후대 몽유록의 경향성을 따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금화사몽유록」은 19세기의 개작본과 20세기 초의 활자본 출현으로까지 이어지면서 변주를 거듭한 매우 인기 있었던 작품이자, 몽유록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