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 필사본(筆寫本).
완질본(完帙本) 2종과 낙질본(落帙本) 24종, 총 26종의 이본(異本)이 전한다. 완질본으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 24권 24책,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본 22권 22책이 있다. 선본(善本)은 서사가 풍부한 장서각본이다.
장서각본의 표제는 “明珠奇逢”이고, 내제(內題)는 “명주긔봉 ᄡᅡᆼ린ᄌᆞ녀별뎐”이다. 정갈한 궁서체(宮書體)로 필사되어 있다.
고려대본의 표제는 “明珠奇逢”이고, 내제는 “명쥬기봉”이다. 5권만 본문에 “쌍용ᄌᆞ녀별전”이라는 표제가 들어 있다. 1899년 수문동에서 필사되었으며, 세책본으로 유통되었을 가능성이 큰 이본이다. 전체 분량이 장서각본의 78%이기 때문에, 장서각본의 서사를 공유하면서도 특정 사건이나 장면을 선별(選別)하여 생략하거나 축약하는 경향이 강하다. 다만 작품 전반에 걸쳐 문구와 어휘를 추가하거나 변이시킨다.
한편, 낙질본에는 “명주기연(明珠奇緣)”이라는 제명(題名)도 나타나는데, 明珠奇峰, 明珠奇鳳傳, 明珠機ㅁ(마멸자) 등 오기(誤記)가 있는 제명도 있다.
한글박물관에 낙질본으로 소장된 김생원 책주본 · 복녀댁 책주본 · 김애순댁 책주본 등은 19세기 중반~20세기 초반에 서민층에서 향유(享有)되었던 정황이 나타난다. 긴 사건을 요약하여 짧게 처리하고, 한자 어구(語句)를 쉽게 풀이하며, 묘사 부분을 간략히 처리하는 등의 특징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현씨양웅쌍린기(玄氏兩熊雙麟記)」의 후편이다. 「명주기봉」은 다시 「명주옥연기합록(明珠玉緣奇合錄)」으로 연결된다. 「명주옥연기합록」은 다시 「현씨팔룡기(玄氏八龍記)」로 이어진다고 되어 있으나 「현씨팔룡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로서 「명주기봉」은 3부 연작 소설(聯作小說)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여러 문헌 자료 기록을 통해, 18세기 중반에 창작되어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궁중과 민간에 널리 유통되며 인기를 누렸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송나라 인종 때 비서각(祕書閣) 태학사(太學士) 평제후 오국공 현수문과 그의 아우인 진국공 현경문은 슬하(膝下)에 각각 7남 2녀씩을 두었다. 오국공의 장자(長子)인 웅린과 진국공의 장자인 천린은 사마양이라는 처사(處士)를 스승으로 두었다. 사마양은 쌍둥이 두 딸을 두었다. 오국공이 처사에게 청혼하였더니 둘째 딸 예주를 웅린의 배필(配匹)로 허락하였다. 얼마 뒤 진국공은 집금오(執金吾) 설계원의 딸을 천린의 배필로 정하였다. 현씨 집안에는 명주 4개가 있었다. 그중 2개는 웅린의 예물(禮物)로 보낸 바 있고, 남은 2개를 천린의 예물로 보내려 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하나의 글이 있었다. “천기(天機)가 미묘(微妙)하니 알려고 하지 말라. 명주 속한 곳이 있느니라.”라고 적힌 글이었다.
신년(新年) 과거 시험에 12세 이상은 모두 응시하라는 교지(敎旨)가 내려와 웅린과 천린은 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글은 고하(高下)를 가릴 수가 없어서 황제는 두 사람을 모두 장원으로 뽑았다. 월성공주가 10세 되던 해 부마(駙馬) 간택(揀擇)의 논의가 있었다. 이때 일광대사라고 하는 한 도사(導師)가 2개의 명주와 한 봉의 글을 올리며 그 명주의 주인을 찾아 부마를 삼으라고 하였다. 황제는 수소문(搜所聞) 끝에 천린으로 부마를 삼으려 하였다. 천린이 기혼(旣婚)임을 빙자(憑藉)하여 거절하자 황제는 천린을 옥에 가두어 두었다가 혼인 전날 풀어 주어 성혼(成婚)하게 하였다. 공주는 현숙(賢淑)하였으나 천린은 그녀를 싫어했다.
처사의 첫째 딸 영주는 웅린을 보고는 동생 예주를 모함(謀陷)하여 내쫓고 자기가 대신 웅린의 아내가 되었다. 천린이 산둥 지방을 순무(巡撫)하고 돌아오다가 병으로 누워 있는 예주 소저(小姐)를 발견하고 그녀를 경사(京師)로 데리고 왔다. 예주는 자신의 무죄함이 밝혀졌으나 현씨 집안에 돌아가지 않다가 시어머니의 간절한 편지를 받고서야 마음을 고쳐먹고 들어갔다.
공주가 영주 소저와 설 소저의 죄를 사하여 줄 것을 간청하자 황제는 그 뜻을 따랐다. 이들은 돌아와서도 자신의 허물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공주가 몇 차례 설 소저를 찾아가 정성껏 회유(懷柔)하자 마침내 그녀는 마음을 고치게 되었다. 한편, 예주 소저도 언니인 영주 소저에게 현씨 집안에 돌아오기를 참된 마음으로 간청하자 그녀도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가짐을 고치게 되었다.
오래도록 태평(太平)스러운 세월이 흐를 무렵 무길이라는 산적이 크게 일어나 변방(邊方)을 합병(合倂)하여 제왕이라 일컬었다. 이에 부마 천린이 출정(出征)하여 무길의 무리를 평정(平定)하였다. 황제는 그 공을 칭찬하고 부마에게 왕의 칭호를 내렸다. 이에 오국공 · 진국공을 비롯한 현씨 집안 사람들은 상이 너무 지나침을 아뢰고 그 칭호를 거둘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끝내 그 뜻을 굽히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부마는 왕위에 올랐다. 그 뒤 현씨 집안 슬하의 직계(直系) 57명, 외손(外孫) 15명 등이 모두 금옥(金玉)같이 자랐다.
이 작품은 다음의 여섯 가지 면에서 그 가치가 인정된다.
첫째, 현웅린과 현천린에게서 보이는 남성상(男性像)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 주인공들 모두가 어려서 과거에서 장원을 하거나 급제(及第)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 앞에 닥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한다. 그 결과 그들은 사회적으로 현달(顯達)하고 가정적으로 화락(和樂)하게 지내게 된다. 이것은 당시 사회인들이 품고 있었던 염원(念願)이 표출된 부분이다.
둘째, 월성공주와 예주 소저로 대표되는 여성상(女性像)이다. 남편이 아내를 권위적(權威的)으로 대하고 경멸(輕蔑)하며 학대하는 조선시대의 환경에 빗대어 보면 월성공공주와 예주 소저 같은 여인이 보여주는 태도는 남다른 데가 있다. 그녀들은 남편의 권위적인 태도나 적국(敵國)의 질투 행위에 조금도 구애(拘礙)되지 않는다. 그들은 타고난 그대로 심성(心性)을 가지고 삶을 살아 나가고 있다. 비록 간악(奸惡)한 여인일지라도 관용(寬容)으로 설득하여 화목하게 지내는 월성공주나, 사회적인 계층이나 신분적인 차등(差等)을 초월하여 인간적인 정을 나누며 살고자 하는 예주 소저와 같은 여인은 당시 사회인들에게 비치는 바람직한 여인상이다.
셋째, 지엄(至嚴)한 왕권(王權)에 대한 의미 반경이 넓어지고 있다. 조선조의 시대마다 왕권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기는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왕권은 또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 작품에서 왕권은 매우 서민성에 가깝다. 왕은 부마 간택에서부터 신하들의 사정(私情), 심지어는 보잘것없는 한 여인의 사사로움까지도 귀를 기울인다. 그런가 하면 비록 황족(皇族)이라 하더라도 무고히 백성을 해치면 분노해 마지않는다. 백성을 위하고 너그럽게 보살피는 자상하고 인자(仁慈)한 왕권이다.
넷째, 한 명의 남성과 결연한 친자매 간의 갈등이 나타난다. 이를 통해 집안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가부장(家父長)의 편애(偏愛) 없는 바른 양육 태도가 중요함을 드러낸다. 더불어 혼인한 여성이 친정 동기(同氣)와 돈독(敦篤)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인정함으로써 친여성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다섯째, 부부 갈등을 통해 이상적인 부부의 요건을 제시한다. 특히 부부간의 화합을 위해서는 체격의 어울림과 정서적 친밀감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보이는데, 이는 자매 갈등과 마찬가지로 여성 친연적인 성격과 맞닿아 있다.
여섯째, 인간관계에서 속이기가 나타나는 여러 국면(局面)과 그 의도들을 섬세하게 포착(捕捉)하고 있다. 이 작품은 모면용 속이기, 모해용 속이기, 유희적(遊戲的) 속이기 중, 유희적 속이기의 출현 빈도가 특히 높다. 속임의 대상은 다수의 남성으로 설정되며, 가문 구성원 대다수의 참여를 통해 속이기가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감정 표출, 갈등 해소, 결속력(結束力) 강화의 계기를 마련하고, 안정되고 여유 있는 현씨 가문의 입지와 위상(位相)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