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간에서의 액막이굿 등이 이에 해당하고 일정한 제례의 절차는 없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바위·돌·나무 등 작은 것에까지도 신이 있다고 생각하여 소중하게 여겼고, 하늘과 땅을 비롯하여 명산과 대천에 복을 빌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국가가 이것을 주관하여 나라에 변고나 재앙이 있을 때마다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받기 위해 신에게 빌었다. 특히 고려시대부터 이러한 제도가 정해져서 불양(祓禳)·여제(厲祭)·나제(儺祭) 등의 명칭으로 행해졌으며, 기곡(祈穀)과 기풍(祈豊)행사도 이에 포함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983년(경종 2)에 기곡제를 지내고 이듬해 우사(雩祀:나라에서 지내는 祈雨祭)를 지냄을 그 효시로 하여 기양의 행사를 열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07년(태종 7)과 1411년·1577년(선조 10)·1698년(숙종 24)·1718년·1730년(영조 6)·1732년·1741년 등에 여역(厲疫)으로 인해서 불양제를 지내어 기양했고, 1527년(중종 22)·1623년(인조 1)·1692년(숙종 18) 국민의 고통과 배고픔을 덜어 주기 위해 나제로 기양한 사실이 있다.
그 밖에 별사(別祀)라 하여 옥추단제(玉樞壇祭)와 회맹제(會盟祭)도 이에 해당되는데, 태조 때 참찬 권근(權近)의 진언에 따라 민간에게 공이 있는 신이면 다 제사를 지내서 기양하기로 정하였다. 이것은 명나라의 예에 따른 것이다.
1451년(문종 1)·1467년(세조 13)·1577년·1593년·1637년(인조 15)·1671년 (현종 12)·1685년(숙종 11) 등 9차에 걸쳐 전망장사를 치제하고 1742년(영조 18) 등 8차에 걸쳐 재해와 역병으로 죽은 사람에게 치제하여 국가의 장래를 기양한 일이 있다. 이 기양에 대한 민간신앙은 명절에 절에 가서 복을 비는 사례와 또는 성황당·명산·대천 등에 치제하는 것으로 민족문화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