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6판. 48면. 1947년 정음사(正音社)에서 간행하였다. 작자의 두 번째 시집인 이 시집에는 첫 시집 『와사등(瓦斯燈)』 이후부터 8·15광복 이전까지의 시 18편이 3부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고, 뒤에 작자의 발문이 붙어 있다.
제1부인 ‘황량(荒凉)’에는 「녹동묘지(綠洞墓地)에서」·「반가(反歌)」·「은수저」 등 태평양전쟁의 와중에서 쓰여진 시 8편이, 제2부인 ‘조화(吊花)’에는 18세에 죽은 누이동생에 대한 개인적 조가라 할 수 있는 「대낮」·「조화」·「수철리(水鐵里)」 3편이, 제3부인 ‘도심지대(都心地帶)’에는 『와사등』 계열의 「추일서정(秋日抒情)」·「장곡천정(長谷川町)에 오는 눈」·「뎃상」·「도심지대」·「단장(短章)」 등 7편이 수록되어 있다.
제3부의 작품들은 첫 시집 『와사등』과 같은 계열인 만큼, 고독과 애수의 정서를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시킨 회화성(繪畫性)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제1부와 제2부에 수록된 시편들에서는 정감의 색채가 시적 변용을 거치지 않고 대부분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는 데서, 김광균의 시세계가 상당히 변질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현상은 전쟁이라는 현실 체험이 시인으로 하여금 절박하고 직접적인 정감의 표현을 강요한 데서 비롯된 결과라고 볼 수도 있고, 이미 모더니즘의 기세가 한풀 꺾인 이후이므로 작자가 새로운 기법이나 시의 회화성에 회의를 느낀 데서 연유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기항지』는 『와사등』에 비하여 보수적인 시 의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와사등』에서 ‘묘지’·‘묘석’ 등 부분적으로 나타나던 죽음의 이미지가 『기항지』에서는 시세계의 중심권을 이루고 있다. 모두 18편의 수록 시 가운데 「반가」·「비(碑)」·「망우리」 등 8편이 누이동생·자식·친구 등 가까운 이의 죽음을 제재로 하고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 시편들이 쓰여지던 무렵의 절박한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작자의 태도에서 인생론적 깊이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과 표현 방식에 있어서 직설적 영탄의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시적 성과는 크게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이 같은 면모는 제3시집인 『황혼가(黃昏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