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은 1923년 손진태·양주동 등이 창작시와 해외시의 소개와 번역을 위하여 창간한 잡지이다. 일본 와세다대학 문과에 다니던 문예 동인들이 귀국했다가 관동대지진 발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하자 발간에 착수했다. 1923년 11월 금성사에서 발행했다. 1925년 5월 통권 제3호로 종간됐다. 창간호의 편집후기에는 《금성》이 “시가요조의 창작과 특히 외국시인의 작품 소개와 번역, 기타 소품을 중심으로 엮어진다.”고 밝히고 있다. 《금성》은 《폐허》·《백조》에 이어 다음 세대의 문학적 관심을 집약하고 창작과 번역을 겸한 동인지라고 할 수 있다.
손진태(孫晉泰) · 양주동(梁柱東) · 백기만(白基萬) · 유엽(柳葉, 또는 柳春燮) 등이 창간한 시 중심의 문예동인지이다. 편집인 겸 인쇄에 유엽, 발행인에 일본인 야나미사와 미치코(柳美澤美子), 장정은 안석주(安碩柱)가 맡았다. 1923년 11월 9일 대동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하여 그 해 11월 10일 금성사에서 발행하였고, 1925년 5월 통권 제3호로 종간되었다. 발행 동기는 당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의 문과에 다니던 문예동인들이 여름방학으로 귀국하였는데, 마침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여 험악해진 일본 국내 사정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서울에 모여 『금성』지의 발간에 착수하였다.
제2호(신년 특대호, 전 118면)는 1924년 1월 25일 발행되었는데, 이때의 인쇄소는 한성도서주식회사로 바뀌었고, 다른 사항은 창간호와 같았다. 제3호는 1924년 5월 24일 발행되었다. 이때의 편집인은 양주동, 저작 겸 발행인은 일본인 야마구치(山口誠子)였는데, 이상백(李相佰)과 이장희(李章熙)가 새로 동인으로 가담했다. 창간 이래로 실무는 거의 유엽이 처리했는데, 제3호에 와서 양주동이 편집 책임을 맡았다. ‘금성’이라는 제호는 여명을 상징하는 샛별의 뜻과, 사랑의 여신 비너스(Venus)의 뜻을 합친 것이다. 여기서 『금성』 동인들의 청년다운 낭만적 취향과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창간호의 「육호잡기(六號雜記)」(편집후기에 해당)에는 『금성』지가 “시가요조(詩歌謠調)의 창작과 특히 외국시인의 작품 소개와 번역, 기타 소품을 중심으로 엮어진다.”고 밝히고 있다. 주요 내용은 청소년적인 낭만을 읊은 시작품들이 대부분의 지면을 차지하였으며, 「기몽(記夢)」 · 「꿈노래」(양주동의 처녀작) · 「영원의 비밀」(이상 창간호) · 「악도(惡禱)」(제2호) · 「풍경」(제3호) 등 양주동의 시작품들, 그리고 백기만의 「꿈의 예찬」(창간호) · 「거화(炬火)」(제2호) · 「은행나무 그늘」(제3호)등이 있다.
또한 유엽의 「낙엽」(창간호) · 「감상(感傷)의 단편」 · 「소녀의 죽음」(제2호 : 이 작품을 유엽 자신은 서사시라 불렀으나 실제와는 다르다.), 손진태의 「만수산(萬壽山)에서」(창간호) · 「처녀의 비밀」(제2호), 이장희의 「실바람 지나간 뒤」(제3호), 이상백의 「내 무덤」(제3호) 등으로, 모두 낭만적 기질과 감정을 표현한 것들이다. 표현상의 특징으로서는 시적 감흥의 직설적 토로나 서술로 인하여 탄력성이 결여된 점이 눈에 띈다. 한편, 백기만의 「청개구리」(창간호)와 손진태의 「별똥」(제2호) · 「키쓰와 포옹」(제3호) 등은 동시(童詩)의 창작을 시도한 점에서 흥미를 끈다.
김근수(金根洙)는 “『금성』지가 일정한 사조나 주의를 내세우지 않고, 눈에 뜨일만한 동인들의 공통 경향도 없었다. 당시의 문단을 풍미했던 우울 · 퇴폐 · 감상에서 벗어나 보다 밝고 건강한 분위기의 작품을 싣고 있다. 이 점이 『금성』지의 특색이라면 특색이라 할 수 있다.”고 평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백철은 『금성』지의 성격을 “ 『백조』지 이래의 자조적 현실주의가 주조를 이루는 퇴폐문학”으로 보고 있다.
『금성』에서 시도된 외국시의 소개 작업은 근대문학사에서 그다지 큰 뜻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보들레르 · 베를렌 같은 프랑스 상징파의 시나 타고르 · 투르게네프는 이미 1918년 무렵부터 김억 · 황석우 등에 의하여 소개된 바 있어, 1923, 1924년경에는 첨단적 사조로서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금성』은 『창조』 · 『폐허』 · 『백조』에 이어 다음 세대의 문학적 관심을 집약하고 창작과 번역을 겸한 동인지였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