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만주 길림의 조양문(朝陽門) 밖 대동공창(大同工廠)에서 의사 나석주(羅錫疇)의 추도회 겸 안창호(安昌浩)의 대연설회가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 때 이와 같은 집회가 개최됨을 사전에 탐지한 일본경찰이 중국 헌병사령관 양위팅(揚宇霆)에게 한국의 공산당이 불법집회를 하고 있으니 붙잡아 일본에 인도하여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말을 곧이 들은 양위팅은 길림독군서(吉林督軍署)에 명하여 한국인을 잡을 것을 지시하였다.
길림독군서는 헌병과 경찰 수백명을 동원하여 길림성내 한국인 가옥을 수색하는 한편, 집회장을 포위하고 안창호 이하 300여 명을 잡아 경찰서에 투옥시켰다. 그 뒤 수감된 한국인 중 독립운동자 50여 명을 고른 뒤 나머지는 석방하였다.
이 때 일본당국이 이들 50여 명을 일본경찰로 인계하여주도록 중국 당국에 강요하였고, 중국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중일간에 외교분쟁이 일어났다. 이 때 이와 같은 사실이 중국신문에 보도됨으로써 국제여론화되었다.
특히, 중국의 각 단체와 학생들이 외국의 혁명가를 부당하게 검거하고 나아가 이들을 타국에 인도한다는 것은 중국의 수치라고 중국정부를 공박하였다. 이와 같은 여론에 끝내 만주의 실력자 장쭤린(張作霖)이 굴복하여 전원 석방함으로써 사건발생 6개월만에 해결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는 1925년 중국과 일본간에 한국독립운동자 체포와 인도에 관하여 합의한 이른바 미쓰야협정(三矢協定)에 그 원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