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전련의(吉田連宜)’라고도 한다. 원래는 승려로서 ‘혜준(惠俊)’이라고 하였으나 707년(성덕왕 6) 8월에 의술을 펼치기 위하여 환속하였다.
‘길’이라는 성과 ‘의’라는 이름을 사여받았으며, 무광사(務廣肆 : 천무 14년에 시행된 관위로 후대의 從七位下에 해당함)를 제수받았다. 714년에 다시 종5하(從五下)에 서임되었고 724년에는 길전련(吉田連)이라는 성을 받았다.
730년에는 노쇠하여 자신의 의술이 단절될 것을 염려하여 제자를 두고 의술을 전수하였다. 733년 12월에 도서두(圖書頭), 738년 윤7월에는 전약두(典藥頭)에 임명되었다.
『회풍조(懷風藻)』에는 「추일어장왕택연신라객(秋日於長王宅宴新羅客)」·「종가길야궁(從駕吉野宮)」이라는 오언시가 전하며, 『만엽집(萬葉集)』에도 산상억량(山上憶良)이 시를 보내준 것에 답하여 보낸 두 수의 노래가 전한다.
길의의 아들은 길전련고마려(吉田連古麻呂)이며, 그 아들은 흥세조신서주(興世朝臣書主)인데 모두 내약정(內藥正)으로서 일본왕의 시의(侍醫)로 활약하였다. 서주의 사망기사에서는 할아버지가 정오상 도서두 겸 내약정상막개길전련의(正五上圖書頭兼內藥正相摸介吉田連宜)라고 하였다.
길의 및 길전련 가문은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이 특정한 기술이나 기능을 세습하면서 활동한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