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관등은 일길찬(一吉飡)이었다. 674년(문무왕 14) 윤6월에 대나마(大奈麻) 김지산(金池山) 및 송사(送使) 귀간보(貴干寶)·진모(眞毛) 등과 함께 일본 텐치왕(天智王)의 죽음을 조문하기 위한 사절로 파견되었다.
이때 대아찬(大阿飡) 김승원(金承元), 아찬 김지산(金祗山), 대사(大舍) 상설(霜雪) 등이 텐무왕(天武王)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하등극사(賀騰極使)로서 함께 쓰쿠시(筑紫)에 도착하였다.
당시 일본은 672년의 임신란이 평정된 직후여서 하등극사 이외의 사신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여 김승원 일행 27인만을 불러들였다. 김살유 등은 쓰쿠시에 남아서 향연과 녹을 받았다.
656년 이후 단절되었던 신라사신의 일본파견은 668년에 재개되었으며 조문사(吊問使)·하등극사, 국내사정을 알리는 사신인 청정사(請政使) 등을 파견하여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노력하였다.
신라의 이러한 정책은 당나라와의 전쟁수행 및 사후수습과정에서 배후를 안정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일본으로서도 672년 이후 견당사(遣唐使)가 중단되었으며, 백제·고구려를 대신하여 신라가 선진문물, 즉 학술·사상·제도를 수용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그 뒤 일본이 율령체제를 정비해가는 과정에서 정어원령(淨御原令) 등에 신라율령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도 7세기 말의 신라와의 긴밀한 교류의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