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등은 급찬(級飡)이었다. 760년(경덕왕 19) 9월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조정이 무쓰오안찰사(陸奧按察使) 종4위하(從四位下)후지와라(藤原惠美朝擖) 등을 보내어 내조한 까닭을 묻자, 김정권 일행은 오랫동안 교린을 못하였으므로 신라왕의 명에 따라 물품을 전하고 또한 일본의 풍속·언어를 아는 자가 없어서 학어(學語) 2인을 파견하고자 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조정은 전에 왔던 신라 사신들이 안하무인이었다. 또 신라 왕자 김태렴(金泰廉)이 사신으로 와서 모든 일을 잘해주겠다고 하고서도 그 뒤 일본에서 파견한 오노(小野田守)를 신라가 홀대한 이유를 물었다. 이에 신라 사신의 지위가 낮으므로 빈객으로 대접할 수 없다고 하고, 국왕의 권한을 위임받은 자를 보내되 충실한 예를 갖추고 공물을 전과 같이 하며 외교문서의 내용을 명확히 하는 조건을 갖추어 사신을 파견하도록 트집을 잡았다. 그 뒤에도 이 일을 계속 트집을 잡으므로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멀어져갔다. 그리하여 779년 사신파견을 마지막으로 일본사서에 신라 사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일본은 727년(발해 무왕 인안 9) 이후 발해가 멸망하기 직전인 919년(애왕 19)까지 30여회에 걸쳐 빈번한 교섭을 가지면서 선진문물 수입 통로를 발해로 바꾸었다. 이처럼 신라의 사신을 돌려보낸 것은 이러한 발해와의 교섭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