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등은 대나마(大奈麻)였다. 764년(경덕왕 23) 7월 김재백 등 91인이 쓰쿠시[筑紫] 하카다진[博多津]에 도착하자, 일본조정은 우소변(右少弁) 종5위하(從五位下) 기우양(紀牛養) 등을 보내어 방문이유를 물었다.
이에 김재백은 당나라의 칙사 한조채(韓朝彩)가 발해로부터 와서 일본승 계융(戒融)을 보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고 하고, 신라의 서진(西津)에 머무르고 있으며 신라의 사은사 소판(蘇判) 김용(金容)이 계융의 도착여부를 한조채에게 알리기 위하여 출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일본조정은 최근에 일본으로 투화한 자의 말에 의하면 신라가 군사를 내어 변방의 경비를 강화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그것은 당나라에 변란이 일어나고 해적들이 들끓으므로 변방을 경계할 따름이라고 하였다. 귀국하기에 이르러 대재부(大宰府)는 계융이 그 전해 10월에 귀국하였음을 통보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