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등은 대나마(大奈麻)였다. 732년(성덕왕 31) 3월 쓰쿠시[筑紫]의 대재부(大宰府)에 도착하였으며, 5월에는 김장손 등 40인이 일본의 도읍에 입경하여 각종 재물과 함께 앵무새·구욕새·촉구(蜀狗)·엽구(獵狗)·당나귀·노새 등의 새와 짐승을 전해주고 사신의 파견횟수에 관하여 물었다.
일본조정은 조당(朝堂)에서 향연을 베풀고 3년에 한 차례 사신을 파견하도록 하였으며, 신라왕과 사신에게 물품을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6월에 귀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같은해 1월 22일에 김장손 일행이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40여일 동안 대재부에 머물러 있었던 셈인데, 이는 일종의 억류상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그 전해인 731년에 일본 병선 300척이 신라의 동쪽 변방을 기습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므로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일본조정으로서도 방문목적이나 사신 일행의 인원수를 확실하게 파악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또한, 김장손이 사신의 파견횟수에 관하여 물은 것도 722년에 발해가 당나라 등주(登州)를 공격한 사건과 동쪽 해안에 일본 병선이 출몰한 사건 등으로 표현된 당시의 정세 속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정기적인 사신파견을 통해서 안정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