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방보(邦寶)
독송정(獨松亭)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04년(연산군 10)
사망 연도
1569년(선조 2)
본관
광산(光山)
주요 관직
형조판서|호조판서
정의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방보(邦寶), 호는 독송정(獨松亭). 우의정 김국광(金國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극뉴(金克忸)이고, 아버지는 김소윤(金昭胤)이며, 어머니는 판서 윤계겸(尹繼謙)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25년(중종 20)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된 뒤 1544년 정언(正言), 1546년(명종 1) 수찬(修撰), 1548년 검상(檢詳)·장령(掌令), 이듬해 집의(執義)·응교(應敎), 1550년 선공감정(繕工監正)을 차례로 역임하여 이듬해 구황 겸 선위사(救荒兼宣慰使)로 청홍도(淸洪道)에 파견되었다.

1552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554년 형조참의가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57년 청홍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어서 대사헌과 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1563년 형조판서, 1564년에는 호조판서가 되었다.

1569년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 등을 현자로 추대할 때에 조광조를 비방한 사실이 드러나 기대승(奇大升) 등의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시흥으로 낙향하여 있다가 분사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매우 청렴하여 1552년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차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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