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덕 ()

근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인천부사 겸 감리인천항통상사무, 홍주부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을사조약 이후 민종식 의진에서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한 문신 · 의병.
이칭
정사(正斯)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2년(철종 3)
사망 연도
1924년
본관
경주(慶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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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인천부사 겸 감리인천항통상사무, 홍주부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을사조약 이후 민종식 의진에서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한 문신 · 의병.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정사(正斯). 김창재(金昌載)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88년에 경과별시문과에 병과로 주1. 1889년에 병조정랑이 되고, 그해 8월 주진독리(駐津督理) 김명규(金明圭)의 종사관이 되었다.

1890년에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이 되었고, 이듬해 5월에 예조좌랑이 되었다. 1892년 시강원필선, 그해 6월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인천부사 겸 감리인천항통상사무(仁川府使兼監理仁川港通商事務)에 임명되었으며, 1896년 2월에 홍주부관찰사(洪州府觀察使)로 임명되었으나 그 직을 사양한 까닭으로 그해 6월에 지도군(智島郡) 고군산(古羣山)으로 2년간의 유배형에 처해졌다가 그해 8월에 주2

1906년 4월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이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키자 군사(軍師)의 책임을 맡아 적극 가담하였다. 민종식과 함께 그해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하였으며, 5월 30일 일본군에 진압되기 전까지 그 기세를 떨쳤으나 붙잡혀 그해 11월 10년 유형을 주3 이듬해 4월에 풀려났다.

상훈과 추모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매천야록(梅泉野錄)』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자료집』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주석
주1

문과 급제 : 『국조방목(國朝榜目)』 卷之十三(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貴11655])

주2

고군산 유배와 석방 : 『고종실록』 34권, 1896년(고종 33) 8월 4일. "민영준 등을 분간하라고 명하다"

주3

의병 참여 : 『고종실록』 47권, 1906년(고종 43) 10월 25일. "이하영이 의병에 참가했던 김상덕을 10년 유배에 처할 것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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