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재령 출생. 1925년 일본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신학부를 졸업하고 조선일보사에 취업하여 문화운동을 펼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1928년에 태평양종교대학 사회사업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광복 이후 1950년까지 조선일보사 취체역으로 근무하면서, 1948년 제헌의회의원에 무소속으로 당선되어(서울 麻浦區) 정계에 나섰다.
1951년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민족항일기 때의 부일협력자들을 선별, 처벌하는 활동을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이승만정권의 근본적인 모순을 느끼고 제3대 민의원 총선에서는 야당인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으로 출마하여 대여투쟁(對與鬪爭)을 전개하였다.
자유당정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여 야당연합인 민주당이 창당되었는데, 그는 1957년 민주당 중앙훈련소장을 지냈다. 1958년 제4대 민의원, 1960년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면서 민주당의 지도급인사가 되었고, 4·19혁명 이후 최초로 실시된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당선되어 초대민선서울시장을 지냈다.
그러나 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정치규제로 묶여 잠시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경기도 안양에서 농축업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1969년 3선개헌논의가 표면화되자, 개헌반대투쟁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1970년신민당(新民黨)에 입당하여 반정부투쟁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3선개헌이 이루어지고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장기집권이 노골화되자, 이에 회의를 느끼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반정부활동을 계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