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김상옥(金尙玉·金相沃). 평안북도 선천 출신.
1919년 3월 1일 선천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6개월 간 복역하였다.
그해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단체인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하였으며, 이 연합회 지령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의주∼선천지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포고문·경고문·『독립신문』 등을 각지에 배부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 모금운동에 헌신하던 중 일본경찰에 다시 잡혀 징역 8년의 선고를 받고 서울과 평양에서 복역하였다.
복역 중 일본경찰의 악형으로 등골뼈의 골절상을 입었다. 1928년 출옥한 뒤 동지 백여범(白汝範)과 같이 중국 광둥[廣東]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채원개(蔡元凱)·강창제(姜昌濟) 등과 같이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29년 흥사단에 가입하였으며, 1930년에는 푸젠성샤먼시[福建省廈門市]에서 이강(李剛)·유수인(柳樹仁) 등과 중국학생구국연맹을 결성하여 중국학생들에게 항일운동을 지도하였다. 1937년 국내 항일공작의 사명을 띠고 대만·일본을 경유하여 부산에 도착한 뒤 선천(宣川)으로 잠입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수개월간 취조를 받았으나 위기를 모면하여 거주제한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1939년 또 다시 국내를 탈출하여 중국으로 가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후 교포들의 귀국편의를 위하여 헌신하다가 귀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