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대한청년단연합회, 흥사단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독립신문 배포 및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김상옥(金尙玉), 김상옥(金相沃)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1년(고종 38)
사망 연도
1969년
출생지
평안북도 선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대한청년단연합회, 흥사단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독립신문 배포 및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개설

일명 김상옥(金尙玉·金相沃). 평안북도 선천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1919년 3월 1일 선천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6개월 간 복역하였다.

그해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단체인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하였으며, 이 연합회 지령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의주∼선천지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포고문·경고문·『독립신문』 등을 각지에 배부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 모금운동에 헌신하던 중 일본경찰에 다시 잡혀 징역 8년의 선고를 받고 서울과 평양에서 복역하였다.

복역 중 일본경찰의 악형으로 등골뼈의 골절상을 입었다. 1928년 출옥한 뒤 동지 백여범(白汝範)과 같이 중국 광둥[廣東]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채원개(蔡元凱)·강창제(姜昌濟) 등과 같이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29년 흥사단에 가입하였으며, 1930년에는 푸젠성샤먼시[福建省廈門市]에서 이강(李剛)·유수인(柳樹仁) 등과 중국학생구국연맹을 결성하여 중국학생들에게 항일운동을 지도하였다. 1937년 국내 항일공작의 사명을 띠고 대만·일본을 경유하여 부산에 도착한 뒤 선천(宣川)으로 잠입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수개월간 취조를 받았으나 위기를 모면하여 거주제한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1939년 또 다시 국내를 탈출하여 중국으로 가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후 교포들의 귀국편의를 위하여 헌신하다가 귀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신재홍, 한국민족운동연구소, 1971)
『한국독립사』(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제73회제국의회설명자료(第73回帝國議會說明資料)」
집필자
신재홍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