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정사령부 헌병파견대장인 베어드 대령과 동거했던 김수임은 1950년 4월 초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녀의 죄명은 첫째, 미군철수계획 등 미군의 중요 기밀문서를 북한에 유출했다는 점과 둘째, 남로당 주요 인사인 이강국이 월북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점, 셋째 북한에서 제조한 위조지폐를 서울로 운반했다는 것, 넷째,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인 이중업을 월북시켰다는 등 19가지의 혐의였다. 그러나 당시 재판기록도 사라지고, 그 내막을 알 수 있는 자료도 더 이상 공개되지 않아 자세한 사실은 아직도 미궁 속에 있다.
1911년 3월 1일 경기도 연천군에서 태어난 김수임은 개성 선죽교 아래 빈민촌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자랐다. 집안은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해 불과 11세에 민며느리로 15세 신랑에게 팔려가다시피 했다. 명랑하며 솔직했던 소녀 김수임은 철없는 신랑의 횡포를 못 이겨 가출했다고 한다. 미국인 독신녀의 양녀가 된 그녀는 이화여전 영문과에 들어가 작가지망생 모윤숙과 기숙사 룸메이트로 지냈다.
김수임은 영어회화에 뛰어나 광복 전 세브란스병원 미국인 치과과장의 비서이자 통역으로 취직했다. 그 당시 공산주의자 이강국을 만나 사랑하게 되어 동거했으나 헤어졌다고 한다. 김수임이 언제 이강국을 처음 알게 되었는지는 확실한 정설이 없다. 그러나 공판 당시 김수임은 “이강국을 안 것은 1942년 즉 지금으로부터 약 9년 전 동무의 집에서 윷을 놀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그 다음날 이강국으로부터 점심을 먹자고 하는 청이 있었다. 그리하여 친하게 되었던 것이며 나 자신도 이강국을 처음 보았을 적에 첫 인상이 좋았고 인격이 고상하고 수재이고 독일 유학까지 하여서 교제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 이강국은 자신을 찾아온 김수임에게 비서를 제안했으나 정작 김수임 자신은 미국인 통역을 맡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1945년 미군정청 통역관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1946년 가을 헌병감이 된 베어드 대령의 특별자문으로 고용돼 1949년 6월까지 미국 정부의 월급을 받았다. 김수임은 모윤숙이 만든 ‘낙랑클럽’이라는 주한 미군 대상의 사교 클럽에서 미국인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베어드와 동거하면서 사교계의 여왕으로 부상했다.
한편 김수임의 간첩사건으로 지목된 공소기록에 등장한 이강국은 당시 북한의 상업성 국장으로 남로당의 주요인물이었다. 이강국은 1906년 2월 7일 경기도 양주(楊州)의 몰락한 사대부 집안에서 이기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5년 보성고보를 우등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했다. 1930년 3월 대학을 졸업한 후 잡지 『신흥』을 발행했으며 1931년 박문규, 유진오, 최용달 등과 함께 조선사회사정연구소(朝鮮社會事情硏究所)를 창립했다. 자산 300만 원의 부호였다는 처가의 도움으로 1932년 독일 베를린대학으로 유학했다. 재학 중 프롤레타리아과학동맹 등의 단체에 간여하면서 독일공산당에 가입하여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이강국은 경성제국대학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가 중심이 된 독서회 그룹에 독일공산당원으로 가담했다. 나치스의 탄압과 일본영사관의 박해로 인하여 1935년 귀국했다. 기소중지 중이었던 그는 귀국과 동시에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1935년 12월 28일 증거불충분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 와중에 잡지에 기고하는 등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도 이주하(李舟河), 최용달 등과 원산(元山)에서 반파시즘운동과 민족해방전선의 통일을 꾀하려고 좌익노조를 결성하였으며 결국 원산 철도국 사건(원산 민족해방전선사건) 등으로 1938년 12월 체포되어 1940년 보석으로 석방되기까지 옥고를 치렀으며 1943년 2심에서 증거불충분으로 5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1945년 8·15광복 전 건국동맹 관계로 여운형과 긴밀히 연락했으며, 광복 후 본격적으로 공산주의활동을 재개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여운형, 약칭 건준)에 참여했다. 건준 조직부장을 맡았지만 박헌영(朴憲永)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전부터 8월테제 작성에 간여하는 등 박헌영과 가까워졌다. 조선인민공화국 체신부장 직무대리와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서기장, 1946년 2월 좌익연합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 및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 미군정이 1946년 5월 조선정판사사건을 계기로 하여 조선공산당 건물들을 철저히 수색하자 박헌영 그룹은 미군정의 전면적인 공격에 대응하여 1946년 7월 소위 ‘정당방위의 역공세’라면서 합법과 비합법의 전술을 배합하는 ‘신전술’을 채택하여 반격을 준비하였다. 1946년 9월초 미군정은 박헌영, 이주하, 이강국 등의 조선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지만, 이강국이 9월 18일 밤 9시 평양방송 전파를 탐으로써 월북사실이 확인되었다.
이강국은 월북 후 1947년 2월 22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 1948년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상업성 법규국장, 1950년 12월 인민군 야전병원장(제69호 병원장: 두만강 부근 소재), 1951년 11월부터는 무역성 산하기관으로 일반제품을 수입하는 회사인 조선상사회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3년 남로당(南勞黨)사건에 연루되어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5년 12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공안당국은 김수임의 간첩 혐의를 감지하고 그녀를 체포하려했지만 김수임의 배후에 당시 거물 실세 베어드 대령이 있다고 생각하여 쉽게 체포하지 못하다가 당시 수사검사가 그녀를 시인 모윤숙의 집으로 유인해 1950년 4월 17일 체포했다.
김수임에게 붙여진 죄명은 국방경비법 제33조 ‘간첩이적행위’였으며 전쟁 발발 10여 일전인 6월 14일∼16일까지 진행된 군법회의는 당시 장안의 화제였다. 당시 혐의는 무려 19가지였다. 골자는 동거 중이던 베어드로부터 비밀정보를 빼내 전 애인이었던 이강국을 통해 남로당에게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1946년 9월 김수임이 베어드 대령의 지프로 이강국을 개성까지 데려다 주었다거나, 1947년 12월 이강국이 남로당에 보낸 공작비(日銀券)를 땔감으로 가장, 베어드 대령이 제공한 군용트럭으로 서울로 옮겼다는 것이다.
1946년 9월 이강국의 월북 시 지프차를 동원하여 도왔다는 혐의는 검토가 필요한 부분인데, 당시는 아직 베어드와 그렇게 가깝지는 않았던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강국은 1946년 9월 박헌영의 지시로 미국차관 도입 반대 명령서를 민전명의로 발표했는데, 이로 인해 체포명령서가 내려졌다는 것이다. 또한 북의 자료에 의하면 이때 박헌영이 월북하라고 지시하여 월북 문제를 베어드와 상의했다고 한다.
북한에 있는 이강국과 연락했으며 1948년에는 지하에 숨어있는 남로당원 박민호·김용봉 등에게 계속 대한민국에 불리한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자기 이복동생이며 남로당원인 최만용과 박민호에게 각각 지프차를 제공하여 남로당 사업을 방조하는가 하면 그들에게 금품을 제공하는 등등 역력한 이적행위를 수없이 감행하였다는 혐의였다. 심지어는 육군특무대에 사형수로 수감 중이던 남로당의 빨치산책(군사부 프락치 총책)인 이중업(李重業)을 빼내 의사로 가장시켜 월북시켰다는 소설 같은 얘기도 혐의로 등장했다.
군사법정은 물적 증거가 충분하지 않았다. 당시 재판부가 인정한 증거 중의 하나인 김수임이 베어드 대령에게 건네받았다는 정보는 이미 한 간행물에 게재된 내용이었다. 오제도(당시 사건검사)가 증거로 제출한 권총은 재판과정에서 기각되었다. 또한 오 검사는 간첩으로 지목된 이중업과 김수임을 서로 연관시키려했으나 검찰 상부에서는 억지라고 판단해 당시 기소항목에서도 제외됐다. 이렇게 자백 등에 의거해 김수임에 대해서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김수임에게 붙여진 죄명은 국방경비법 제33조 ‘간첩이적행위’였으며 전쟁 발발 10여 일전인 6월 14일∼16일까지 진행된 군법회의는 당시 장안의 화제였다. 당시 혐의는 무려 19가지였다. 1950년 6월 16일 벌어졌던 마지막 재판에서 법정은 사형을 언도했다. 재판장은 “한 남자에 대한 애정이 간첩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요지로 판결했다. 군법회의 판결문은 규정 상 영구 보존되어야 하지만 현재 김수임 판결문은 행방불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