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규 ()

유교
인물
일제강점기 『한사초집』, 『창수집』 등을 저술한 유학자.
이칭
이칭
창수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0년(고종 17)
사망 연도
1957년
본관
초계
출생지
합천
정의
일제강점기 『한사초집』, 『창수집』 등을 저술한 유학자.
개설

경상남도 합천 출생. 본관은 초계(草溪). 호는 창수(蒼樹).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하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세 때 권명희(權命熙)에게서 수학하였고, 23세 때부터는 송병선(宋秉璿)을 스승으로 모셨다. 송병선이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음독자결하자 송병순(宋秉珣)의 문하로 들어갔다. 일본이 은사금을 보내고 경학원의 강사로 나오도록 요구한 것을 거부하여 송병순이 음독자결하자 이후 전우의 문하에서 종신토록 의귀하였다.

중년 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모원재(慕遠齋)에서 강학하면서 의리를 지키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정형규는 일제에 항거하여 순국한 열사들의 전기를 저술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모두 항일의리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뜻을 담고 있었다. 더 나아가 정형규는 망국의 통탄함을 금치 못하면서 『한사초집(韓史抄輯)』이라고 하는 역사서를 새로 쓰기도 하였다.

학문과 사상

정형규는 전우의 성리학적 입장을 철저하게 계승하고 있었는데, 정형규의 이기론(理氣論)에서 바탕이 되는 핵심은 ‘이무위(理無爲) 기유위(氣有爲)’였다. 당시 이(理)의 능동성에 대한 문제의 제기는 주자학적 명제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주요 논거였는데, 정형규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 이무위(理無爲)를 주장하면서 이의 능동성을 주장하는 견해들에 대해 비판하였다.

심성론에서도 기호학의 전통적 논의에 따라 ‘성즉리(性卽理) 심시기(心是氣)’를 고수하였다. 정형규에게서 이(理)나 성(性)은 항상 윤리·강상과 관련되어 있었으며, 심(心)은 그것에 대한 인식의 주체 문제였다. 따라서 심본성(心本性)이나 성사심제(性師心弟)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윤리·강상을 명확하게 인식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정형규는 기호학파의 학문적 전통에 기초하여 전우의 학설을 실천적 측면에서 충실히 받아들였으며, 그것에는 성리(性理)와 실사(實事)의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학문적 지향이 깔려 있었다. 또한 국망(國亡)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유교적 의리에 기반을 둔 강인한 척사 의식과 실천성을 보여 주었으며, 유교적 도의(道義) 교육과 계승을 위해 평생의 노력을 기울였다.

저서

저서로는 역사서 『한사초집(韓史抄輯)』과 문집 『창수집(蒼樹集)』이 있다.

참고문헌

『간재집(艮齋集)』
『창수집(蒼樹集)』
『한사초집(韓史抄輯)』
집필자
이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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