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미군정 당국은 주한 미 점령군 감축 및 철수에 대비하여 한국의 토착 군사력을 육성할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1월 13일 군정 법령 제28호로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책임자로서 미 제24군단의 헌병참모인 쉬크(Lawrence E. Schick) 준장이 취임하였다.
국방사령부는 장차 한국정부 수립에 대비한 국방군 창설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에 따르면 국방군을 육군과 공군으로 구분하되, 육군의 규모는 3개 보병사단으로 구성된 1개 군단으로 하고, 공군은 1개 수송 비행 중대 및 2개 전투 비행 중대로 편성하며, 육군 및 공군의 총병력을 45,000명으로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또 해군 및 해안경비대를 5,000명 선으로 제한하여, 육·해·공군의 조직을 1949년까지 완료하며 해군 및 해안경비대의 모집을 그 해에 착수하기로 되어 있었다.
주한 미 점령군 사령관 하지(John R. Hodge) 중장은 11월 20일 이 계획에 동의하였으나,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은 남한에 군대를 창설하는 문제는 자기의 권한에 속하지 않는다 하여 이를 워싱턴 당국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삼부조정위원회(SWNCC)는 남한에서 단독적으로 군사력을 창설할 경우 미소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였다. 미군정 당국이 한국군 창설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의 고위 정책결정 당국이 이를 꺼리게 된 것은 머지않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게 될 시점에서 만일 한국군을 창설한다면 미·소간의 교섭에 의해 한반도의 통일이 실현되기 어려우리라고 전망했기 때문이었다.
한국군 창설계획을 포기한 하지 중장은 11월 20일, 쉬크 준장의 후임인 챔페니(Arthur S. Champeny) 대령에게 새로운 지침을 하달하고, 25,000명 규모의 필리핀식 경찰 예비대를 창설하기 위한 계획을 작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작성된 것이 ‘뱀부계획(Bamboo Plan)’이었다. 이 계획에 의하면 경찰의 국내치안을 지원할 경찰예비대를 남한 8개도에 각각 1개 연대씩 창설하게 하여 1946년 1월부터 도별로 대원모집에 착수하되, 우선 1개 중대씩을 창설한 후 이를 단시일 내에 연대규모로 확대하기로 되어 있었다. 화기 중대가 없는 미군 보병중대를 기준으로 하여 장교 6명, 사병 225명으로 구성된 1개 중대를 편성하고, 장교는 중앙의 장교훈련학교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각 지역에서 1개 중대가 편성되는데, 대략 정원의 20%를 초과하면 또 다른 중대를 신설하고, 이 같이 3개 중대가 되면 중대본부와 대대본부를 구성하여 1개 대대를 만들고, 그 이후 두 번째, 세 번째 대대를 각지에서 연대로까지 점진적인 확대를 구상하는 계획이었다.
국무부에 의하여 승인된 하지 중장의 뱀부계획은 그 후 국방경비대의 창설과 발전을 위한 청사진이 되었다. 한편 앞서 한국군 창설계획을 추진했던 쉬크 준장은 주한 미 점령군 지휘관의 통역관을 양성하는 동시에 한국군의 간부 요원을 확보하기 위해 1945년 12월 5일 서울시 서대문구 냉천동에 있는 감리교 신학교에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를 설치하였다. 군사영어학교는 그 후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자 교사(校舍)를 태릉으로 이전했다가 1946년 4월 30일 폐교되었는바, 이 학교출신자들은 이후 신생 국방경비대의 장교로서 크게 공헌하였다.
뱀부계획에 따라 1946년 1월 11일 조선경비대총사령부가 설치되었으며, 1월 15일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다. 1946년 1월 15일 경기도 태릉 주둔 제1연대를 시작으로 8개 연대가 2월 말까지 창설되었고, 제주도가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자 11월 16일 제주도에서 제9연대가 창설되었다.
국방사령부는 미 군정청의 국제(局制)를 부제(部制)로 개정할 무렵인 1946년 3월 29일 군정법령 제63호에 따라 국방부로 개칭되었다. 국방부의 임무와 기능은 국방사령부와 같았는데, 다만 창군 준비단계로부터 증편과 장비지원 및 인사관리 업무의 시행단계로서 경비대와 해방병단의 체제구축에 주력했다. 그러나 당시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 측이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국방부란 명칭을 사용한 것에 대해 항의를 하자 그해 6월 15일부로 국내경비부(Department of International Security)로 개칭했다. 그러나 한국 측에서는 국방의 뜻을 살리고자 구한말 군제의 삼영 가운데 하나인 중영(中營)을 통합한 통위영을 따서 통위부라 호칭할 것을 주장하여 개칭했다.
1948년 7월 17일 정부조직법(법률 제1호)에 의해서 국방부가 설치되었으며, 다시 그해 11월 30일 법률 제9호로 공포된 국군조직법에 근거하여 국방조직이 편성되었다. 국방조직은 대통령이 국군의 최고통수권자가 되며,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국군통수상 필요한 명령을 발할 권한을 분명하게 명시했다. 법률에 규정한 바에 의하면, 대통령의 통수범위 하에 최고국방위원회와 그 소속 중앙정보국, 국방자원관리위원회, 그리고 군사참의원을 두되 그 직제는 별도의 법률로 정했다.
이렇게 국방조직은 군정을 장악하는 기구로 국방부를 두었고, 군령은 국방부 내 참모총장이 담당하도록 했다. 이러한 법률의 규정에 따라 국방부에는 참모총장(參謀總長)과 참모차장(參謀次長)을 두고, 그 밑으로 육군본부와 해군본부를 두어 각각 총참모장(總參謀長)과 참모부장(參謀副長)을 두었던 것이다.
국방기구의 편성에 이어서 1948년 12월 7일 국방부의 직제가 대통령령 제37호로 공포되어 국방부 본부와 육군본부 및 해군본부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인 조직이 확정되었다.
뱀부계획은 주한미군정청의 한국경찰예비대 창설계획으로, 이에 따른 경찰예비대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군의 근간으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