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김병주(金炳疇). 평안남도 강서 출신. 아버지 김경서(金慶瑞)이다.
1910년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부모를 도와 농사를 돕는 한편, 독학으로 한문과 일본어 등을 공부하였다. 1915년 서울의 구황실 근위대에 입대해 1918년 3월까지 근무했다.
1919년 3월 3일 향리의 모락장(沙川)에서 전개된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었으나, 주민들의 격렬한 시위운동 결과 이튿날 석방되었다. 이 해 4월 중국 남만주로 망명해 한국인 소학교 교사로 종사하다가 6월부터는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망명 직후부터 ‘승빈’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일제의 압박에 따른 중국 지방정권의 종용으로 신흥무관학교가 1920년 6월 북간도 안도현(安圖縣) 오지로 이동한 뒤 6개월 동안 훈련을 마친 학생들을 중심으로 교생대(敎生隊)가 조직되자 이청천(李靑天) 등과 함께 여기에 참여하였다.
1920년 10월 말 북간도 일대에서 ‘청산리전투’가 일단락된 뒤 교생대는 홍범도(洪範圖) 부대 및 광복단(光復團) 등 독립군 부대와 연합해 ‘대한의용군’을 조직하였다. 이 때 소대장의 직책을 맡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후 여러 독립군 부대와 함께 시베리아로 건너갔다.
1921년 4월 이만(일설에는 자유시)에 모인 3,000여 명의 독립군 부대는 ‘대한독립단’을 결성하고 역량을 집결시켜 체계적 항일무장투쟁을 전개코자 하였다. 이에 따라 같은 해 5월 홍범도 휘하의 주요 지휘관으로서 오하묵(吳夏默)이 지휘하는 한인 독립보병여단(일명 사특의용군)에 들어가 중견 간부의 직책을 맡았다.
같은 해 6월 독립군 부대들이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에서 조직한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 산하 제3연대로 편제되자 이 부대의 장교로 활약하였다.
이 해 8월 고려혁명군정의회가 해산되고 한인 부대가 1개 독립연대로 재편된 뒤 부연대장을 맡았으며, 이르쿠츠크에 세워진 사관학교의 교관으로도 활동하였다.
1922년 8월 김좌진(金佐鎭) 및 박일리야 등과 함께 이만에서 150여 명으로 구성된 ‘통군서(統軍署)’ 독립군(빨치산) 부대를 조직하고 10월까지 북만주 및 시베리아 일대에서 반일·반백위파(反白衛派) 전투에 참가하였다.
1923년 봄부터 1929년 8월까지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의 한인학교 교원으로 근무했으며, 1927년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4년 8월까지 전문학교와 원동종합대학에서 일본어 교원으로 일했다.
1937년 11월부터 1946년 12월까지 러시아와 한국의 국경지대인 핫산지역의 국경부대에서 장교로 근무하였다. 1938년 소련군과 일본군이 국경문제로 충돌한 ‘장고봉(張鼓峯) 사건’ 때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전했으며, 1945년 8월 소련군의 대일항전에도 참가해 공을 세웠다.
1958년 소련군 대좌로 전역한 뒤 하바로프스크에서 연금으로 생활했고, 소련 정부로부터 ‘붉은 별’ 훈장 및 ‘일본 타승’ 훈장 등 모두 6차례의 훈장을 받았다.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에 아들 및 딸 등 유족이 살고 있다. 하바로프스크 공동묘지에 묘가 있다.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