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박호전투는 1933년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이 연합해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만주의 경박호에서 섬멸한 전투이다. 일제가 만주국을 수립하자 북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이 어려워진 한국독립군은 일제에 맞서기 위해 중국 항일의용군인 길림구국군과 연합하였다. 연합부대는 이동하는 길에 우연히 일·만군의 정보를 듣고 경박호에서 매복하였다가 공격하였다. 연합부대는 일·만군 후속부대 1개 대대를 거의 전멸시키고 많은 물품을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다. 경박호전투는 연합부대 최초의 승리로 항일무장 투쟁을 더욱 고양시켰다.
1932년 11월 하순 2차 쌍성보(雙城堡) 전투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한국독립군은, 그해 겨울 보급물자가 부족하자 한때 부대를 해산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일제의 괴뢰국가 만주국이 수립, 체제가 정비되며 하얼빈 주위의 북만주 지역이 점차 일 · 만군의 세력권에 편입되자 활동에 큰 위협을 받게 되고, 한인 동포사회와도 단절되는 등 항일투쟁 조건이 매우 악화되었다.
이에 지청천(池靑天) · 김창환(金昌煥) · 오광선(吳光鮮) · 조경한(趙擎韓) · 신숙(申肅) 등 한국독립군 지도부는 1932년 말 한국독립군 작전지역을 종전의 북만주 지역에서 동포들이 많이 사는 간도 일대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간도 지방에서 활동하던 중국 측 항일의용군인 길림구국군과 힘을 모아 일제와 싸우는 방안도 논의되었다. 그리하여 한국독립군에서는 1933년 1월경 강진해(姜鎭海) · 공진원(公震遠) · 심만호(沈萬湖) 등을 동녕현(東寧縣)에 있는 길림구국군 사령부에 파견, 합작을 교섭하였으나 별 성과는 얻지 못하였다.
이는 길림구국군이 이 무렵 한국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19사단의 간도 파견 여파로 항전 활동에 큰 타격을 받고 각 부대가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왕더린[王德林] 예하 스스잉[柴世榮] 부대는 일본군에 맞서 완강하게 항전은 계속하고 있었지만, 갈수록 독자적인 작전수행이 어려워져 다른 부대와의 공동작전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계속되자 한국독립군과 스스잉의 부대 양 진영에서는, 강력한 일 · 만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로의 힘을 모아야 한다는 합작당위성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 1월 13일 한국독립군과 스스잉이 지휘하는 길림구국군 제14사(師)는 합작하여 공동작전을 전개하는 데 합의하고, 잠정적으로 부대의 명칭을 중한연합토일군(中韓聯合討日軍)이라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2월 10일, 참모장 신숙과 참모 김상덕(金尙德)을 난징[南京]의 국민당정부에 특파, 무기와 탄약 등을 후원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당시 연합군부대 규모는 약 1,000명 정도였는데, 길림구국군이 약간 더 많은 편이었다.
경박호전투는 한국독립군이 동만 지역으로 이동하던 도중 일 · 만군과 뜻밖에 부딪쳐 일어난 전투였다. 1933년 2월 우가둔(牛家屯)에 머물렀던 한국독립군은 그 달 28일경 길림구국군 스스잉의 부대와 함께 동쪽으로 이동, 경박호 동쪽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날 일본군 약 1개 대대가 동경성(東京城)을 출발, 경박호 방면으로 진격해 온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에 한 · 중연합토일군은 일 · 만군의 통과가 예상되는 호수 주변 계곡의 양쪽 산기슭에 부대를 나누어 매복시키고 일 · 만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예상대로 그 날 저녁 전초대 1개 분대와 기병 1개 중대가 지나간 뒤 일 · 만군 후속부대가 얼음 위를 행군하며 양군의 매복지점에 도달하였다. 이에 연합군은 빙판 위에 그대로 노출된 일 · 만군을 향해 맹렬하게 사격을 퍼부었고, 불의의 기습에 일 · 만군은 제대로 대응도 못한 채 도망가고 말았다. 이들을 추격한 연합군은 1개 대대(400여 명 내외)를 거의 전멸시키고 소총 및 경기관총 70여 정, 실탄 6,000여 발, 기타 많은 물품을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는 한국독립군이 동만 지역에서 스스잉의 부대와 연합하여 거둔 최초의 승리였으며, 양 부대의 사기를 고무시켜 항일무장 투쟁을 더욱 고양시켰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