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청천(池靑天)·조경한(趙擎韓) 등이 거느리는 500여 명의 한국 독립군은 6월 말 간도의 대전자령(大甸子嶺)에서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의 스스잉(柴世榮)부대와 합동작전을 전개, 막대한 군수물자를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해 8월 하순경 스스잉부대가 우이청(吳義成) 휘하로 통합된 뒤 한국 독립군도 우이청이 지휘하는 길림구국군부대와 연대하게 되었다.
중소국경 지대에 있는 동녕현성에는 500여 명의 일본군과 1,500여 명의 만주국군, 기타 다수의 관헌이 주둔하고 있었다. 정치·군사상의 요충지로서 일·만군의 군수품이 다량 비축되어 의용군과 독립군이 보급품을 획득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그리하여 이 해 9월 6일나자구(羅子溝)에서 이동해 온 한국 독립군은 스스잉·스충헝(史忠恒) 등의 부대 및 중국 공산당 내 한인유격대와 연합, 동녕현성을 공격하게 되었다. 이들의 총병력은 약 2,000명으로서, 밤 9시경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때 중국 공산당유격대는 성의 서문 밖 서산포대(西山砲臺)를 습격하고 기타 부대는 서문과 동남쪽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한인유격대는 격전 끝에 서산포대를 점령하였고, 서문 방향으로 진공한 한국 독립군부대와 스충헝부대는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고전하였으나, 결국 서문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스스잉부대는 비교적 순조롭게 성문을 격파하고 시가지에 진입하였다. 한중연합군은 이튿날 새벽까지 시가지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무저항을 약속했던 만주국군이 격렬하게 저항하고, 대포와 장갑차를 앞세운 일본군이 대거 반격해 와 연합군은 점차 수세에 몰렸다. 결국, 전세가 불리해져 후퇴하다 일·만군에 많은 손실을 입었다. 한국 독립군도 총사령 지청천이 부상당하고 수십 명이 전사하였다.
한국 독립군 등 연합부대는 이 전투에서 비록 패배하였지만, 수백 명의 일·만군을 살상하고 대량의 전리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이념을 달리하는 무장세력이 항일을 위해 공동작전을 벌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특히 후일 만주 지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에 한 본보기가 되었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