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이홍해(李弘海)·이홍규(李弘奎). 의산(義山)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하였다. 경기도 용인 출신이다.
1919년 고향에서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인 학생과 싸운 것이 계기가 되어 1년만에 퇴학당하였다. 이후 집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틈틈이 조부에게 한문과 경서 등을 배웠다.
1925년 부모를 따라 중국 길림성(吉林省) 반석현(磐石縣)으로 이주했다가, 이듬해에 다시 이통현(伊通縣)으로 이사해 소작농이 되었다. 1927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산하의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에 가입해 이통현 일대의 농민운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이후 1930년 말 이통현 삼도구(三道溝)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이통현 당지부서기가 되었다. 이 해 반일회(反日會)와 농민회 등 단체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십 수 명으로 구성된 ‘노동적위대’를 조직하고 악명높은 지주들을 응징·처벌해 명성을 떨쳤다. 또한 1930년 말부터 이듬해에 걸쳐 중국 공산당 쌍양(雙陽)-이통현 지부 서기와 반석중심현위원회(磐石中心縣委員會) 위원 등의 직책을 맡아 농민운동을 주도하였다.
1931년 9월 일제가 중국동북지역(만주)을 침략하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이 해 10월 이통현에서 7명의 한인 청년들을 토대로 ‘적위대’를 창건해 항일무장투쟁 및 반봉건투쟁에 나섰다. 이 적위대는 추후 ‘개잡이대(일명 打狗隊)’라는 속칭으로 널리 알려졌다.
1932년 5월에는 반석현의 합마하자(蛤蟆河子)에서 한인 농민 500여 명과 다수의 중국인 농민들이 참가한 대규모 항일농민봉기를 주도해 일제 침략의 통로인 길해철도(吉海鐵道: 吉林과 海龍사이의 철도)의 일부 구간을 파괴하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 같은 해 6월에는 기존의 적위대를 반석공농반일의용군(磐石工農反日義勇軍, 약칭 반석의용군 또는 반석유격대)으로 확대 개편하고 본격적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이 때 이홍광은 제2분대 정치위원의 직책을 맡았다. 반석의용군은 일본군 및 괴뢰 만주국군과 싸우면서 50여 명으로 증가했고 4개 분대체제로 재편되었다.
1932년 여름에 일본군의 항일부대 유격근거지 토벌작전이 전개되자 흑석진(黑石鎭) 전투를 주도해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해 12월 중국공산당의 방침에 따라 반석의용군이 ‘중국 홍군 제32군 남만유격대(약칭 남만유격대)’로 개편되자 참모장을 맡아 적극 활동하였다.
이후 중국인 양정우(楊靖宇, 본명 馬尙德)와 함께 남만주 지방의 반석·쌍양·이통·화전(樺甸) 지방에서 항일유격전을 전개했다. 1933년 전반기에는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항일근거지 포위 공격에 맞서 60여 차례의 공방전을 벌이며 끈질기게 투쟁해 이들을 격퇴하였다. 그리고 부대 규모도 250여 명으로 대폭 증가하였다.
이 무렵 중국 동북의 여러 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이 고조되고 중국공산당의 항일민족 통일전선방침이 강화되면서 1933년 9월 18일 남만유격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獨立師)로 개편되었다. 이 때 참모장이 되어 이 조직을 영도하였다. 당시 제1군 독립사의 대원은 300명 가량이었는데, 대다수가 한인들이었다.
그 뒤 이 부대는 화전·몽강(濛江)·휘남(輝南)·금천(金川)·유하·통화현 등 남만주 일대에서 다수 민중의 지지를 토대로 치열한 유격전을 전개해 일제의 만주국 통치에 타격을 주었다. 특히 같은 해 11월 만주국군 토벌대가 주둔하고 있던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를 기습해 적의 본거지를 점령하고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34년 8월경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는 700여 명 규모로 성장했고 영향력도 커지면서 이 해 11월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사 사장(師長) 겸 정치위원의 중책을 맡았다. 이후 1935년 초까지 주로 반석현 남부 지역과 압록강 상류 지역 사이에서 일제 및 만주국 관헌과 싸웠다.
그러나 같은 해 2월 13일에 200여 명의 한인 대원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국내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후주고읍)을 기습 공격, 국내외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동흥읍습격 전투는 항일무장투쟁세력에 의한 1930년대 최초의 대규모 국내 진압작전이었다.
동흥 점령전투에서 10여 명의 일본인을 살상한 외에 일제의 통치시설을 일부 파괴하고 많은 군자금과 물자를 노획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및 친일부호로 지목된 10여 명을 응징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일제의 추격을 받게 되었다.
1935년 5월 남만주 환인현(桓仁縣)과 흥경현(興京縣)의 접경지인 노령(老嶺)에서 일본군 및 만주국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중상을 입고 환인현의 밀영에서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