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김창화(金昌華). 평안남도 평양 출신이다.
1925년 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이 학교의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독서회’에 가입해 진보적 학생들과 함께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식민지 조국의 현실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9년 12월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이에 적극 참가해 숭덕중학교의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일제 경찰 당국의 추적을 받게 되자 동지들과 함께 중국 남경(南京)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남경 오주(五州)중학교에 입학해 중국어 등을 수학하는 한편, 한국인 학생들의 비밀조직인 ‘사회과학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33년 오주중학을 졸업하고 광주(廣州)의 중산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 중 한국인 학생단체인 ‘용진학회(勇進學會)’에 가입했고, 1933년 10월에는 이 학회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중국내 항일운동과 반봉건운동을 주도하였다.
또 1935년 여름에는 중국공산당과 연계된 ‘중국청년항일동맹’에 가입해 중국 학생들의 항일운동에 동참하였다. 이 해 12월 12일 중국 광주(廣州)의 중산대학 학생 3,000여 명이 참가한 항일시위운동 ‘12·12학생운동’에 주요 지도자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12월 중순과 하순에 전개된 광주(廣州) 학생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광동 군벌 진제당(陳濟棠)의 탄압으로 1937년 1월 중순 체포되어 잠시 옥고를 치렀다.
1936년 7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37년 6월 중산대학을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뒤 광주 교외 농촌의 소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광주청년항일선봉대’ 등 항일조직을 건립해 항일운동의 기초를 닦았다. 같은 해 9월에는 중국공산당의 근거지 연안(延安)에 있는 중앙당학교에 가서 공산주의 사상과 이론을 학습하였다.
그 뒤 중국 관내지역의 한국인 독립운동 조직인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 진기로예(晉冀魯豫) 변구(邊區) 당학교 교무과장과 조직과장 등을 맡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말에는 한국인들의 항일무장투쟁 조직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치위원(또는 중앙특파원)과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진기로예 지회 지회장을 겸하며 중국 관내지역 한인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1942년 1월에는 ‘조선혁명청년간부학교’ 건립에 참여했으며, 이 학교의 부교장이 되어 독립운동가들의 교육에도 헌신하였다. 장기간의 독립운동에 따른 과로와 영양실조로 폐렴을 앓고 있었으나,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항일전투에 동참하였다.
1942년 5월 일본군의 태항산(太行山) 일대 포위공격에 맞서 ‘반소탕전(反掃蕩戰)’을 전개하다 산서성(山西省) 마전(麻田)의 화왕산(花王山)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중국 하북성(河北省) 한단시(邯鄲市) 혁명열사능원(革命烈士陵園)에 가묘가 있고, 하북성 섭현(涉縣) 석문촌(石門村) 뒷산에 묘와 기념비가 있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