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문명철(文明哲) 또는 한광(韓光). 전라남도 담양 출생이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한 뒤 1933년 여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 해 9월 중국 국민당 정부 지원으로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義烈團)에서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 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 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이 학교 전술학 교관인 김종(金鍾일명 김준)의 조카이기도 한 김일곤은 이 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주로 문명철이란 가명을 사용하였다.
1934년 2월 하순경 이 학교를 중퇴하고 임시정부의 김구(金九)가 운영하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 한인특별반으로 전학하였다. 한인특별반에서 공부할 때는 한광(韓光)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 역시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한인특별반을 졸업한 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10월 중국 우한(武漢)에서 편성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입대하였다.
그 뒤 국민당 정부군과 함께 중국의 후난[湖南]·후베이[湖北]·광시[廣西]·윈난성[雲南省]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특히, 1939년 일본군의 전차를 두 대나 파괴하는 큰 전공을 세워 국민당 정부로부터 광영(光榮)훈장을 받았다.
1941년 7월경 조선의용대가 중국 공산당의 활동 지역인 화북 지방으로 이동하자 여기에 동행하였다. 조선의용대가 국민당과 임시정부의 활동 지역에서 벗어나 북상한 뒤 3개 지대의 화북지대(華北支隊)로 개편을 하자,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의 제2분회 제2소조(小組) 조장 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대의 대원이 되었다.
그 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자 조선의용군 진서북지대(晉西北支隊) 책임자의 한 사람이 되었고, 동시에 화북조선독립동맹 진서북분맹(晉西北分盟)의 조직위원을 겸하여 활동하였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일본군과 싸워 많은 공을 쌓았다.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반소탕전’을 전개하다, 1943년 4월 14일 한·중 양군보다 10여 배나 많은 일본군에 포위되어 치열한 격전 끝에 전사하였다.
사후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서 성대한 추도회를 거행하였고, 팔로군측에서도 조의를 표명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