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주원(周元). 중국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 출신. 왕칭현 민가(民呵)의 중농인 박덕과(朴德課)와 어머니 전씨(田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은 함경북도 회령군이다.
1925년 왕칭현립 제5소학교에 입학했지만, 1927년경 수해를 입어 가정형편이 어려워지면서 가까스로 1929년에 졸업하였다. 재학중 진보적 학생들의 조직인 ‘친목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4세 때인 1930년 왕칭현 제3소학교 고등과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부족으로 3개월만에 중퇴하였다.
이 해 6월부터 1932년 6월까지 고향의 나루터에서 뱃사공으로 일했다. 동창생 박창수(朴昌洙)의 권유로 1932년 4월경 반제동맹(反帝同盟)에 가입한 뒤 11월부터 중국공산당 왕칭현위원회 아동국장으로 활약하였다. 이듬해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고, 이후 서기로 활동하였다.
20세 때인 1936년 3월 북만주 닝안현[寧安縣]에서 동북항일연합군 제5군 제1사(師)에 입대하였다. 이 때 처 김옥순(金玉順)도 같은 부대 지원부에 입대해 부부가 함께 항일투쟁에 투신하였다. 같은 해 5월 경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뒤 동북항일연군 제5군 정치주임 등의 요직을 맡아 본격적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1937년 7월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3사 조직과장이 되어 부금현(富錦縣) 일대에서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9년 3월에는 동북항일연군 제3군 3사 7단 정치주임으로 전보되어 허형식(許亨植) 등과 함께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 해 4월 중 적 ‘토벌대’와 싸우다가 부상당해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
1940년 4월에는 항일연군 제3로군 제6지대 중국공산당(北滿省)위원회 서기겸 제17지대 정치지도원의 직책을 맡아 항일투쟁 조직의 영도와 정치 및 사상이론 교육을 담당하였다.
1941년 6월부터 제3로군 12지대장의 중책을 맡아 대일항쟁을 주도하는 한편, 10월 경에는 북만주 지역의 농민 무장조직을 결성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반만주국(反滿洲國)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 따른 어려운 생존조건으로 인해 1930년대 후반부터 40년대 초반에 걸쳐 만주 지방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이 쇠퇴하였다. 이에 동북항일연군 지도부와 소련 극동군은 1942년 8월 초 잔존 동북항일연군 대원들을 소련 적군 제88특별여단(일명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으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박길송에게 북만주에서의 투쟁을 중단하고 소련으로 들어올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박길송은 이를 거부하고 북만주 지방을 무대로 완강하게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하였다.
1942년 12월 30일 북만주의 북안성(北安省) 칭청현[慶城縣]에서 만주국 경찰대와 교전하다 부상을 입었다. 요양 도중이던 1943년 1월 4일 일본인 경찰대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었다. 같은 해 8월 12일 일제 당국의 사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