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파나시아르센지예비치 (KimAp’anasiArŭsenjiyebich’i)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공산당 연해주위원회 고려부장, 포시에트 구역당 제1비서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0년(고종 37)
사망 연도
1938년
출생지
연해주 연추
관련 사건
연해주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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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공산당 연해주위원회 고려부장, 포시에트 구역당 제1비서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연해주 연추의 수하노프카 마을 출생. 니콜스크-우수리스크시에서 김나지움을 졸업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9년 3월 블라디보스톡의 반일시위에 참가하여 오성묵과 함께 일본영사 앞으로 조선에서 일본 헌병대가 행한 시위진압에 대한 항의문을 전달하였다.

1920년에 빨치산 활동을 도와 일본어로 선전 전단(傳單)을 작성하였다. 1920년 4월 연해주참변을 피하여 아무르주 블라고베센스크 시로 이주하여 5월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1년 5월 이르쿠츠크의 고려공산당 창당대회에 참가하여 이르쿠츠크파의 대회 주동에 반대하다 출당되어 시베리아 벽지에 유배되었다.

11월 유배지를 이탈하여 모스크바로 가서 이동휘의 통역으로 레닌을 면담하게 되었다.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딘스크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참가하여 코민테른 파견 대표단의 일원이 되었다. 1923년 1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적기단 결성대회에 참가하였다.

1923∼1925에는 공산당 연해주위원회 고려부장을 역임하고 1932년에는 모스크바 아카데미에서 학습하였다. 1933년 연해주 포시에트 구역 농기계 임경소 정치부장으로 있었으며 콜호즈 사업으로 레닌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력을 배경으로 하여 포시에트 구역당 제1비서로 1934년 7차 소련공산당대회에 참가하여 연설하였다. 이 때가 김아파나시아르센지예비치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곧 1935년 일본 첩보기관을 위하여 일하였다는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1938년 총살당하였다. 스탈린의 사후에 복권되었다.

상훈과 추모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편, 창작과 비평사, 1996)
『일제하 극동 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마뜨베이 김, 이준형 역, 역사비평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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