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적 ()

근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비서원승, 봉상사제조, 궁내부특진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혜길(惠吉)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0년(철종 11)
사망 연도
미상
본관
광산(光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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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비서원승, 봉상사제조, 궁내부특진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혜길(惠吉). 한성부판윤과 형조판서·공조판서를 지낸 김구현(金九鉉)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80년(고종 17) 경과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6년에 홍문관박사가 되었고, 이듬해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을 거쳐 그 해 9월에는 이조정랑이 되었다. 1888년에는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1891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1893년 지도(智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형을 받았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899년에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고 칙임관 4등에 올랐으며, 규장각직학사(奎章閣直學士)·비서원승(秘書院丞)을 거쳐 이듬해에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가 되었다. 1901년에는 장례원소경(掌禮院小卿)·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에 임명되었다. 그 해 11월에는 다시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에 임명되었다. 1899년부터 1902년에 이르기까지 궁내부특진관을 지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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