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이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충청북도 옥천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9년(고종 26)
사망 연도
1958년
출생지
충청북도 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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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충청북도 옥천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충청북도 옥천 출신. 1919년 3월 27일, 같은 마을사람 육창주(陸昌柱) 등과 이원(伊院)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태극기 3개를 만들어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던 중, 주동자 육창주와 허상기(許相基)가 헌병주재소로 연행되자, 허량(許樑)·이면호(李冕鎬)·허상구(許相球) 등과 300여 명의 군중을 인솔하여 헌병주재소로 달려갔다.

이 때 출동한 일본헌병에게 태극기를 빼앗기고 연행되었으나, 다시 100여 명의 군중이 주재소로 들이닥치자, 일본헌병이 발포하는 사이 혼란한 틈에 탈출하여 주재소를 공격하는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검거되어 5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자료집』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독립운동사』 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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