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김용제(金容濟). 황해도 안악 출신.
1906년 안악에서 면학회(勉學會)를 조직하고 안악사범강습소를 운영하였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가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 활동하는 한편, 안악 양산학교(楊山學校) 교사로서 애국청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08년에는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송종호(宋鍾昊)·김구(金九) 등과 결성하고 민족교육 진흥에 힘썼다. 1911년 일제가 우리 나라 민족지도자를 탄압하기 위하여 조작한 이른바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 암살미수사건, 즉 '105인 사건'에에 연루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1913년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어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일제의 엄중한 감시를 피하며 동지들과 연락하였다.
192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조직을 목적으로 시행한 연통제(聯通制)에 가담, 안악군참사(安岳郡參事)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