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찰어사(監察御史)·우사낭중(右司郎中)을 거쳐 문종 때 어사대부(御史大夫)·중추원사(中樞院使)·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하였다.
1057년 병부가 동서 양계에 군사를 보내어 수비하기를 청하므로 김원정은 왕에게 “근래 군사와 백성이 책봉사(冊封使)를 송영(送迎)하느라 시달렸고, 또 흥왕사(興王寺)의 역사(役事)로 쉬지 못했으며, 자량(資糧: 비용과 식량)도 거의 떨어져가니 봉책군(封冊軍)의 예에 의하여 물품을 주어 보내소서.”라고 청하여 이를 좇게 하였다.
그 해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에 승진하였다. 1058년에 수사도(守司徒)가 되었고, 뒤이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주국(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上柱國)이 되어 서경(西京)을 다스리면서 일을 아뢰다가 왕의 뜻을 거슬러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로 좌천되었다가 곧 소환되었으며, 1063년 수태위문하시중(守太尉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동북로병마사(東北路兵馬使)가 장주(長州)·정주(定州)·원흥진(元興鎭)에 성을 쌓았는데, 김원정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요충로에 주둔하며 방비하다가 적과 만나 전투를 벌여 전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포상을 받았다.
그가 사망한 후 4년 뒤에 부의와 추증이 빠져있다는 건의에 따라, 추증하고 곡식 130석을 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