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음성의 이속 출신으로 학문에 힘써 문과에 급제하였고, 동도(東都: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의 장서기(掌書記)를 거쳐 국학학정(國學學正)이 되었는데 7재(齋)의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신종 때에는 진양목사(晋陽牧使)에 올랐고, 동도와 영천(永川) 지방에 난이 일어나 안무사(安撫使)를 보내고자 하였으나 그 적임자를 얻기 어려웠는데, 채정이 동도유수부사(東都留守副使)가 되자 난적(亂敵)이 스스로 해산, 안정되었다.
1211년(희종 7) 대사성(大司成)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관장하였고, 1214년(고종 1)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동지공거(同知貢擧), 1216년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지공거를 역임하였다. 고종 초에 서도유수(西都留守)로 보직되었다가 추밀원부사에 이르러 사직하였다. 적도(賊徒)를 평정한 공으로 나라에서 장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