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김좌진장군 생가지 성역화사업은 1989년부터 시작하여 10년 만인 1998년 1월 생가지 및 기념관까지 완공되어 충의정신(忠義精神)의 계승 발전을 위한 산 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김좌진장군은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하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하였다. 이듬해에는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여 근대화에 앞장섰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후 대한협회(大韓協會)ㆍ기호학회(畿湖學會)ㆍ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등의 간부를 지냈다.
1913년에는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가담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한 후 1917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 후 13년간 평생을 항일전투에 몸바쳤다. 3ㆍ1운동 후에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20년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 있었던 청산리전투를 총지휘하여 일본군 제19ㆍ21사단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 3,300여 명의 일군을 섬멸시키는 독립군 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그 뒤 부대를 흑룡강 부근으로 이동,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여 부총재를 지냈다.
1925년에는 영안(寧安)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여 군사부위원장이 되었다. 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부교장을 지내면서 정예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1929년에는 한족연합회(韓族聯合會)를 조직하여 주석이 되어 황무지개간ㆍ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그러던 중 고려공산청년회의 김일성(金一星)의 사주를 받은 박상실에게 암살당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