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대전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92년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ㄱ자형의 안채와 헛간을 복원하고, 1996년에 생가지 앞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신채호는 8세에 아버지를 여의자 할아버지를 따라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 할아버지가 차린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 19세 때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26세에 박사가 되었다.
황성신문(皇城新聞)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통해 민족의식의 앙양과 독립정신의 고취에 힘썼으며, 28세(1907)에는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여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적극 지원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해조신문·대동공보·권업신문 등의 발행을 주도하였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의정원(議政院)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에 선임되었다가 1921년 임시정부의 분열상을 보고 사직하였다.
1920년 북경에서 박용만 등과 군사통일촉진회(軍事統一促進會)를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승만을 성토하였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 창조파 맹장으로 활동하다 결렬되자 북경으로 돌아와 다물단을 조직·주도하였다.
이 무렵 역사연구야말로 정치운동, 무장운동 못지않은 독립운동임을 깨닫고 국사연구를 본격화하였다. 1924년부터 동아일보 등에 게재한 「평양패수고(平壤浿水考)」,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 「조선역사상 일천연래 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25년부터는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보여 1927년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無政府主義 東方聯盟)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4월에는 북경에서 열린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회의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1927년 신간회 결성 시에는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8년 대만의 기륭항(基隆港)에 상륙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호송되어 1929년 5월 9일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중사상범으로 다루어져 여순 감옥의 독방에 수감되어 복역하다 1936년 향년 57세로 옥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