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북청 출신. 1919년 3·1운동 후 함경남도 혜산진의 대안인 장백현(長白縣)에서 이희삼(李熙三)·이동백(李東白)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을 조직하여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11월에는 이동백의 집에서 장백현지단을 결성하고 총무장이 되었다. 이어 농장을 경영하면서 많은 항일투사를 양성하였고, 국경지대의 일본경찰주재소와 수비대를 습격하여, 감금되어 있던 독립군 13명을 탈출시키기도 하였다.
1921년 1월에는 장백현 부근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군비단을 비롯한 태극단(太極團)·광복단(光復團)·대진단(大震團) 및 흥업단(興業團) 지부의 대표 50여 명이 장백현에 있는 대진단지부 사무소에 모여 압록강연안 각 독립단체의 연락과 과감한 행동전개를 목적으로 하는 연합회를 조직하였다.
10월에는 연합회를 중심으로 각 단체를 병합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지휘·명령에 따르는 통일기관으로 대한국민단을 결성하였는데, 이 때 군사부장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동삼성(東三省)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그 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