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8월 6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생하였고, 일본에서 와카야마현 상업학교[和歌山縣 商業學校]를 졸업하였다. 우리 나라 자동차공업의 개척자이며 기계공업 분야의 개척자로서 중공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경제인이다.
경제개발 초창기 신진자동차주식회사(新進自動車株式會社)를 설립하여 ‘신진 코로나’ 승용차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고 국산 자동차를 국내에 보급하여 자동차공업을 일으켰다.
자동차공업은 근대 종합산업의 상징으로서 기계공업과 전자산업, 그리고 다양한 부품산업 등을 연관시키는 산업연계효과가 크고 고용효과가 큰 산업이므로 그 나라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산업이다. 이러한 중요한 산업인 자동차공업을 당시 어려운 여건에서 일으킨 김창원·김제원(金濟源) 형제의 명성은 신진자동차·신진그룹(기업집단)과 더불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자동차산업의 핵심분야인 기계공업을 발전시키고 자동차공업 분야와 연계하여 발전시키기 위하여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韓國機械工業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책임 경영을 하다가 동생인 김제원에게 경영권을 넘겨 주기도 하였다. 당시 세계에서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30개 국가도 못되는 상황이었다.
경제개발 초기에 25만 달러의 운크라 자금으로 수공업식 자동차 수리공장부터 시작해서 8,000대의 ‘코로나’ 승용차를 비롯 ‘퍼브리카 크라운’ 트럭 등 21만 대를 생산하여 181억 원의 매출액을 올려 1968년까지는 자동차산업을 신진자동차의 김창원·김제원 형제가 이끌어 왔다.
1967년 12월에 설립되어 1969년부터 현대자동차주식회사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이듬해 아세아자동차주식회사가 가동되고, 1972년 6월 대우자동차주식회사(이전 회사명:GM KOREA, 새한자동차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자동차산업에 뛰어들기 전까지는 외롭게 홀로 국내 자동차산업을 발전시키는 일익을 담당하여 경제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1968년 이후에도 자동차산업의 선구자로서 신진자동차와 그의 역할은 지속되었다. 그는 한국이연공업주식회사(韓國理硏工業株式會社) 전무를 역임하였고, 신진관광주식회사(新進觀光株式會社) 대표이사, 한국자동차검사협회(韓國自動車檢査協會)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코리아파이스공업주식회사 회장, 주식회사 거화(株式會社巨和) 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언론에도 관심이 많아 경향신문사(京鄕新聞社) 회장을 역임하였다.
체육 분야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맡아 체육발전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는데, 대한탁구협회 회장, 대한체육회(大韓體育會) 부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동생 김제원과 함께 사업을 경영하면서 형제간에 의리좋고 사이가 좋아 경제계의 모범이 되기도 하였고, 동생과 함께 어려운 시절을 슬기롭게 극복하였다. 또한 애향심을 발휘하여 마을문고를 위시하여 사회에 거금을 환원하여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솔선한 모범 기업가이기도 하였다.
주한튀니지 명예총영사를 역임하고, 신진학원 이사장, 재단법인 신진장학회(新進奬學會)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제도화하여 실천한 훌륭한 경제인이며 동시에 사회사업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훈장(國民勳章 無窮勳章)·은탑산업훈장·대한민국체육공로상(大韓民國體育功勞賞)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