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이율(而栗), 호는 역락재(亦樂齋). 의성 가사리(佳士里)에서 출생. 아버지는 참봉 김응주(金應周),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참봉 남세기(南世期)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문장이 조숙하여 남의 칭찬을 받았으나 실천하는 학문을 하고자 애친과 경장을 실천의 강령으로 삼았다. 효성이 지극하여 양친을 잘 섬겼고, 상을 당해서는 시묘를 지성껏 했다. 1589년(선조 22) 남산 아래 서사를 짓고 지방의 선비들을 모아 역(易)·예기(禮記)를 강의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격문을 사방에 보내서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여 남산에 보(堡)를 쌓아 적의 침공을 막았다. 격문을 보고 모여드는 의군이 늘어나자 동생인 김치중(金致中)을 시켜 적라산(赤羅山)으로 분대하여 수호하고 적의 대군이 밀려오자 격전을 벌려 공을 세웠으나 김치중은 전사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장현광(張顯光)을 따라 강소에서 학문을 강론하였고, 장현광이 의성군수가 되어서는 향교의 훈장이 되었다. 병암정사(屛巖精舍)를 지었고, 『문소지(聞韶誌)』를 편찬하였다.
1650년(효종 1)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1653년에 부호군(副護軍)에 올랐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의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저서로는 『역락재집(亦樂齋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