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에 1040년(정종6년) 서북로병마사가 왕에게 아뢰기를 “『김해병서』는 무략(武略)의 요결(要訣)이오니 청컨대 연변의 주진(州鎭)에 각각 한 책씩 하사하소서.” 하니 왕이 이를 따라 행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김해병서』를 연개소문이 지었다고 주장한 학자는 신채호(申采浩)이다. 연개소문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시도했던 신채호의 입장으로는 마땅히 저자 미상인 이 병서의 정체를 밝혀 장막에 가려진 삼국시대 전쟁사의 일면을 재조명하려 했을 것이다.
그가 이러한 결론을 내리는 데는 노상운(盧象雲)의 공이 컸다. 그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자는 김해로 병법이 고금에 뛰어났으며 『김해병서』를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고려 때까지도 병마절도사가 지방에 부임할 때는 한 벌씩 하사되었으나 오늘날은 아주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이 병서로 당나라의 명장 이정(李靖)을 가르쳤으며,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인 이정이 저술한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 원본에는 이정이 연개소문에게서 병법을 배운 이야기를 자세히 쓰고 연개소문을 숭앙한 구어(句語)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당 · 송 사람들이 이를 수치로 여겨 그 병서를 없앴다고 한다.
신채호는 지금 전하는 『이위공병서』는 서문에 “연개소문은 스스로 병법을 안다고 하였다(莫離支 自謂知兵).”는 말을 넣어 연개소문을 헐뜯고 있다고 하였으며 그는 이 병서를 위서(僞書)로 보았다.
그러나 『김해병서』 · 『이위공병법』이 현존하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므로 신채호의 주장처럼 연개소문이 이정에게 병법을 가르쳤다는 것을 액면 그대로 신빙할 수 없다. 다만, 현존하지 않는 『김해병서』의 저자가 연개소문이든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까지 일정한 영향을 끼친 무경(武經)의 하나였을 개연성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