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예안리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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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예안리 고분군 전경
김해 예안리 고분군 전경
선사문화
유적
국가유산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움무덤 · 구덩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이칭
이칭
예안리고분군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김해 예안리 고분군(金海 禮安里 古墳群)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고분군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78년 06월 23일 지정)
소재지
경남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369-6번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움무덤 · 구덩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예안리고분군은 1978년 6월 23일 사적 제261호로 지정되었다. 이 고분군은 말산〔馬山〕의 남쪽 경사면과 연결된 낮은 모래구릉에 조성되어 있다. 현재 예안리 일대는 50여 호의 집, 도로와 경작지 등으로 변형되어 외형상 고분군 유적지임을 식별하기 곤란하다.

발굴조사는 1976년 5월부터 1980년 1월까지 5차례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 및 부산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실시되었다. 조사지역은 현 경작지인 낮은 모래구릉쪽 일부이다. 조사결과 이 유적에서는 가야시대의 각종 고분이 밀집, 중복된 상태로 노출되었다.

특징

조사된 고분은 모두 212기로 움무덤〔土壙墓〕64기, 구덩식장방형돌방무덤〔竪穴式長方形石室墓〕108기, 독무덤〔甕棺墓〕24기, 앞트기식방형돌방무덤〔橫口式方形石室墓〕16기이다.

움무덤은 예안리고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널방의 장축방향은 동서향과 남북향이 있으나 동서향이 압도적으로 많다. 구조상으로는 딸린덧널〔副槨〕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규모는 으뜸덧널〔主槨〕하나만으로 된 일반적인 크기의 제86호 무덤이 길이 340㎝, 너비 165㎝, 높이 60㎝ 정도이다.

움무덤에 있어서 널이나 덧널의 사용 여부는 불명확하다. 그러나 일부 유구 중에 봉분이 널방 안으로 무너진 상태가 U자형을 이루고 있어, 널 또는 덧널을 사용한 무덤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구덩식장방형돌방무덤은 널방의 장축방향이 대개 동서향 아니면 남북향인데, 동서향이 약간 더 많다. 구조는 장방형에 가까운 구덩이를 파고 판석·깬돌〔割石〕으로 네 벽을 쌓은 뒤 5∼6매의 뚜껑돌을 덮은 형태이다. 규모는 일반적인 크기에 속하는 제9호 무덤이 길이 270㎝, 너비 64㎝, 높이 60㎝이다. 널방의 네 벽 축조상태나 바닥시설의 상태가 축조시기의 선후에 따라 변화를 보이고 있으며, 판석이 깬돌보다 먼저 사용되었다.

독무덤은 길쭉한 항아리 2개 또는 3개를 연결해 만들었는데, 2개를 연결한 것이 일반적이다. 규모는 항아리 3개를 연결한 경우에도 전체 길이가 1m 미만이다. 독무덤은 대부분이 구덩식장방형돌방무덤에 인접해 이 무덤의 장축과 나란히 설치되어 있어 상호 친근관계에 있는 배장묘(陪葬墓)임을 알 수 있다. 남아 있는 사람뼈도 유아분으로 이 독무덤은 모두 유아용임을 보여주고 있다.

앞트기식방형돌방무덤은 구덩식장방형돌방무덤보다 널방의 너비를 훨씬 넓게 만들어 형태가 거의 정방형에 가깝다. 정방형에 가장 가까운 제78호 무덤의 경우, 길이 232㎝, 너비 222㎝이다. 현재 이들 무덤은 유구의 상부가 거의 파손된 상태이기 때문에 천장의 축조상태와 널방 입구의 폐쇄상태 등이 불확실해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남은 벽석의 축조상태나 유해의 안치상태 등으로 볼 때, 단벽(短壁)의 일부를 입구로 이용한 앞트기식임이 틀림없다.

각 고분의 유물 배치상을 살펴보면, 구덩식장방형돌방무덤이나 움무덤에서는 예외적인 몇 기를 제외하고 토기는 모두 시신의 발 아래쪽 일정한 지점에, 철기는 널방의 양 장벽(長壁)을 따라서, 손칼은 예외없이 시신의 손 부근에서 출토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앞트기식방형돌방무덤은 각종 유물이 널방 안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독무덤은 별도의 껴묻거리〔副葬品〕는 없고 시신에 착장시켜 놓았던 구슬 정도가 남아 있다.

껴묻거리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토기는 종류가 회백색 와질(瓦質), 적갈색 연질(軟質), 회청색 경질(硬質)의 3가지이다. 그릇모양은 가야토기의 다양한 각종 모양을 고루 갖추고 있다. 이 중 굽다리접시류〔高杯類〕와 항아리류〔壺類〕는 각 고분마다 거의 예외없이 부장되어 있다.

화로모양토기〔爐形土器〕, 두드림무늬〔打捺文〕의 둥근바닥짧은목항아리〔圓底短頸壺〕는 거의 모든 움무덤에서 출토되어, 이 무덤의 표식적 유물이 되고 있다. 세경호(細頸壺)·편호(扁壺)·접시모양토기〔皿形土器〕들은 앞트기식방형돌방무덤에서만 출토되었다.

철기는 투구·도끼·화살촉·창·손칼·큰칼·덩이쇠〔鐵鋌〕·꺾쇠·가위·재갈 등이 출토되었다. 장식품으로는 금제·금동제·은제·동제 등의 귀걸이〔耳飾〕와 유리제·수정제·호박제·석제(石製) 등의 구슬이 있다. 귀걸이는 가는고리식〔細環式〕이다.

사람뼈는 움무덤·구덩식장방형돌방무덤·독무덤에서는 원칙적으로 한 무덤에 1구분(軀分), 앞트기식방형돌방무덤에서는 5∼8구분의 유해가 잔존하였다. 사람뼈에 대한 연구는 현재 접합·계측 등이 진행되고 있는데, 제85호 움무덤 사람뼈는 편두(扁頭)임이 판명되었다.

의의와 평가

예안리고분군에서는 거의 모든 무덤마다 사람뼈가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거의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는 고대 사람뼈 연구에 더 없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이 고분군에서 조사된 많은 유구가 비교적 분명하게 중복된 상태로 노출되었기 때문에 고분이 축조된 시기의 선후관계와 고분의 종류에 따른 껴묻거리의 변화내용 등을 알 수 있다. 투구가 출토된 제150호 움무덤은 여러 움무덤 중에서도 이른 시기의 것으로, 가야지역에서 처음으로 투구가 사용된 시기문제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고분군의 조성시기는 가야시대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오랜 기간에 걸쳐 있다. 묘제를 보면, 가야시대의 모든 묘제가 이 고분군에서 공존하고 있어, 가야시대 묘제의 변천을 한 눈에 보여준다. 그 축조시기는 움무덤, 구덩식장방형돌방무덤 및 독무덤, 앞트기식방형돌방무덤 순이다. 즉, 가야고분으로서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되면서도 주류를 이루는 묘제는 움무덤이며, 그 다음으로 구덩식장방형돌방무덤이 유행하였다. 이들 무덤이 조성되는 시기까지의 가야묘제는 일회용 홑무덤〔單葬〕의 전통이 유지되었다. 그 후에는 앞트기식방형돌방무덤이라는 새로운 묘제가 등장하였다. 이 묘제는 추가장묘(追加葬墓)로서 이 시기가 되면 가야묘제의 전통은 가족묘로 발전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다양한 묘제가 공존하는 예안리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류를 통해서 삼국시대 토기의 상대편년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를 제공받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김해 예안리 고분군Ⅱ」(부산대학교박물관, 1993)
「김해 예안리 고분군Ⅰ」(부산대학교박물관, 1985)
「김해예안리 85호분출토편두골에 대하여-위지한전의 편두기사와 관련하여-」(김정학,『한우근박사정년기념사학논총』, 1981)
「김해예안리고분군 제4차발굴조사」(신경철·김원룡,『한국고고학연보』8, 1981)
「낙동강하류예안리석관묘-가야묘제의 일례-」(임효택,『부대사학』3, 1979)
「낙동강하류가야토광묘의 연구」(임효택,『한국고고학보』4, 1978)
「김해례안리고분군발굴조사예보」(김정학,『한국고고학보』2, 1977)
「김해예안리의 가야고분군발굴조사약보」(강인구,『박물관신문』60, 국립중앙박물관,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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