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으며, 1977년에 사망하였다.
김희남은 1917년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1929년 국내로 들어왔다. 국민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동지 규합에 힘쓰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2개월간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 뒤 다시 동삼성(東三省)으로 건너가서 1933년 등철매(鄧鐵梅)가 이끄는 중국 항일군의 고문에 취임하였다.
김희남은 동삼성에 거주하는 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면서 일본 경찰이 벌이는 조선인과 중국인이 대한 이간책을 폭로하고 분쇄하는 데 앞장섰다. 1931년 조선에서 ' 만보산사건'으로 반중국인 폭동 사건이 일어나는 등 조선인과 중국인의 관계가 심상치 않았다. 1931년 7월 2일 중국 장춘(长春) 만보산에서 조선 농민이 수로 문제로 중국 농민과 충돌하여 피해를 입었다는 신문 기사에 자극을 받은 한국인들이 조선에 있는 중국인을 폭행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러한 배경 하에 김희남의 활동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934년에는 중국 항일군 별동대사령(別動隊司令)으로 취임하였으며, 내성(內城) · 용왕묘(龍王廟) · 대고산(大孤山) 등의 전투에 참여하여 일본군 수백 명을 사살하였다. 1936년 묘극수(苗剋秀) · 조동(趙同) 등과 같이 중국 철혈군을 조직한 뒤 외교처장에 취임하고 항일군의 통합적인 활동을 위하여 애썼다. 1938년 중국 철혈군이 붕괴되자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파원이 되어 동삼성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43년 재만교포 학생을 중심으로 독립군을 편성하고 국내 진입 작전을 계획하였다. 국내로 잠입하여 의병대장 박치익(朴治翼), 유림 대표 김두운(金斗運) 등과 의논한 뒤에 이북 5도 유림으로 독립군 응원단을 조직하던 중 1945년 8 · 15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