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김희백(金熙百). 평안남도 평양 출신.
독립운동을 위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북간도의 대한국민회에 가담하였다. 이어 본부를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 두고 의병장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의 일원으로,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활약하였다.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이후 독립군에 대한 일본의 대규모 군사작전으로 독립군의 조직이 약화되자 영신중학교 교사로 재인 중 조직 강화를 위하여 활동하다가, 1921년 11월 용정(龍井) 주재 일본영사관 직원에게 붙잡혀 재류금지명령을 받고 원산으로 송치되었다.
그 뒤 다시 간도로 건너가 잡화상을 하면서 대한국민회 제15지회의 간부로 활동하다가, 1924년 동지 강동렬(姜東烈)·김성한(金聖漢)과 함께 일본영사관 경찰에 붙잡혔다. 1925년 1월 21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1925년 3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당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