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봉암(逢菴). 평안남도 성천 출신.
23세 때 동학에 가담하여 나인협(羅仁協)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다. 1919년 2월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을 만나 3·1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그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 달 27일 최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나인협·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권병덕(權秉悳)·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의 동지와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성명을 열기하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스스로 붙들리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