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아명(雅名)은 봉길(奉吉), 별명은 나비장군. 자는 영훈(泳薰), 호는 포석(抛石). 경기도 고양 출신.
무과 출신자로 여겨지며 대한제국의 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연성학교에서 육군 정위로 복무하였으며 1907년 9월 군대해산 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선발되어 국비유학생으로 유학하였다.
1908년 귀국하였으며 1910년 국권이 일제에게 침탈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에 나섰다. 만주 망명 이전에는 나영훈(羅泳薰)을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 『고종실록(高宗實錄)』 및 「나영훈 이력서」등에서 보이나 망명 이후에 비로소 나중소(羅仲昭)로 개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1919년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현천묵(玄天默)·이범석(李範奭) 등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였으며,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왕청현(汪淸縣)에 설립된 사관양성소 교성대장(敎成隊長)을 맡아 무장항일투쟁의 실력을 길렀다.
1920년에 일본군 19사단과 21사단이 북로군정서를 목표로 양협작전을 전개한다는 정보에 따라 임전조직의 단행으로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10월 하순(21~26일) 대소 10여 회의 청산리대첩에서 참모장으로 총사령관 김좌진과 함께 사상 유례 없는 대승을 거두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20년 겨울, 대한독립군단의 일원으로 노령(露領)에 들어갔다가 소련의 기만을 예견하고 김좌진과 함께 북만주 영안(寧安)으로 돌아와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참모부 위원장을 맡아 무장항일투쟁의 구체적 계획을 작성하였다.
한편, 목릉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데에 힘썼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